묵상&설교

히브리서 5장1-10절 / "아론"같은 그러나 "멜기세덱"같은 대제사장

양치는선비 2010. 7. 10. 01:25

송병주 (선한청지기교회)

 

아론과 같이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 첫번째로 소개하는 것은 아론과 같은 대제사장이라는 점이다. 4절에 대제사장으로서 예수님의 모습은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자라야 할지니라.” 고 제시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이 사람의 연약함을 공감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설명되고 있다. 2절말씀은 매우 강렬하다. “그가 무식하고 미혹된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는 것은 자기도 연약에 휩싸여 있음이라.” 너무나 가슴에 와 닿는 표현은 연약에 휩싸여 있다는 표현이다. 우리의 대제사장인 예수 역시 연약함에 휩싸여 있는 존재라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된다. 주의할 것은 이것이 열등하고 저급하다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철저히 비천과 무능의 자리에 함께했다는 것이다.

예수의 가장 위대한 속성은 바로 천계를 여는 능력이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을 향한 공감이다. 그의 공감은 지적 형식적 이해가 아니라 심정적 공감이다. 예수는 인간의 연약함을 머리로 이해하는 존재가 아니라 마음과 가슴으로 느끼시는 분이시다. 필자는 이것을 삶의 애틋함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애틋하다는 말이 무엇인가? 안타까움, 갈망, 사랑, 아쉬움으로 속이 타는 듯하지만 다 표현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연약한 인간을 향해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있지만, 그 사랑의 갈망으로 속이타지만 다 표현못하는 애틋함이 우리 주님의 가장 큰 속성이다. 우리의 무지와 계속되는 실패로 절망할때에도 우리 주님은 나를 향한 애틋함으로 붉은 눈시울을 안고 우리를 향해 Big Hug를 주시는 분이시다. 왜냐마혐 우리 만큼 연약함에 휩싸여 계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며 개인적으로 깊은 은혜가 있다. 그것은 연약함에 휩싸여 있을때 사명을 발견하라이었다. 연약함에 휩싸여 있을때 절망하고 포기하고 원망하는 무너진 삶을 살 수 있다. 반면에 연약함에 휩싸여 있는 것을 통해 무지한 자와 미혹당하는 자를 용납하는 통로로 삼는 삶을 살 수 있다. 예수는 연약함의 삶의 자리를 통해 연약한 백성을 끌어안는 삶의 과정으로 삼았던 것처럼,연약함으로 휩싸여 있는 나의 삶도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확인한다. 상처입은 자들을 치유자로 세우심과 같이 연약함에 휩싸여 있을때 오히려 우리를 사용하실 소망의 줄을 다시 붙들어 본다. 자녀를 잃은 사람들, 사랑하는 가족의 오랜 투병을 지켜 본 사람들, 사랑하는 배우자를 먼저 보내었던 사람들허리케인처럼 우리를 휩쌌던 고통이 같은 고통과 아픔을 가진 사람들을 위로하는 도구가 될때, 그 고통조차 은혜로 고백하게 된다.” 그래서 스스로 도전해 본다. “연약함에 휩싸여 있을때, 다시 사명을 발견하라.”

 

멜기세덱과 같이

예수님의 모습에 대해 두번째로 발견하는 것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는 점이다. 6절과 10절에 2번에 걸쳐서 강조되는데, 이것은 아론과 같다는 말과 달리 예수님이 인간의 연약함을 뛰어넘어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예수의 속성은 연약함을 공감하는 것으로 멈추지 않는다.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의 이야기를 통해 그것을 뛰어넘어 구원의 통로가 되는 예수의 속성을 보여주고 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이 승전하고 돌아오며 십일조를 마친 살렘왕이며 제사장이었던 사람으로 창세기에 잠깐 등장하고 사라진다. 하지만, 이 멜기세덱은 구속사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모형(Typology) 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거의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멜기세덱 하면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바친 이야기만 최선을 다해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정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멜기세덱이 받은 십일조가 아니다. 멜기세덱을 통해 계시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 우리는 좀더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첫째 우리가 가져야 할 관심은 아브라함이 드린 십일조가 아니라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준 것이다. 14:18에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떡과 포도주를 내어 놓았다. 이것은 신약의 성찬과 같은 맥락으로 멜기세덱은 우리에게 주님의 살과 피가 우리를 구원할 것이며 이를 위해 예수가 살찢고 피흘릴 것을 미리 예표한 것이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살찢고 피흘리며 우리를 위한 화목제물로 속죄제로 드려질 것이라는 예수의 사역이 이렇게 멜기세덱을 통해 이미 예표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는 말은 그가 우리를 위해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둘째 멜기세덱은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는 특징을 가졌다고 소개된다( 7:3). 히브히서 7장을 통해 보는 멜기세덱의 특징은 바로 여호와의 존재 속성이다.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는 존재라는 말은 말 그대로 나는 스스로 있는자니라고 하는 여호와의 이름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멜기세덱을 통해 예수를 여호와와 동일한 속성으로 설명하는 모형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를 통해 예수 안에 빛나는 신성 (Divinity)를 제시함으로 삼위일체론적 신론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는 말은 예수가 단순이 인간이라는 것이 아니라 빛나는 신성을 가진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존재성을 보여주고 있다. 

셋째 멜기세덱은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면서 살렘왕으로 제정일치리더십을 가진 존재로 묘사된다( 7:1, 창세기). 왕권과 제사장권을 다 아우른 자로 소개되는 것은  예수가 대제사장이면서 왕이시다는 계 19:16으로 연결된다. 예수는 삼중직을 가진 존재로 , 제사장, 선지자의 직분을 모두 취하셨다. 이것은 단지 높은 분이라는 계급적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가지 직분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대리 실현하는 통로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세가지 직분을 다 소유하셨다는 의미는 하나님 통치의 대리실현이 아니라 직접실현으로 바꾸셨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삼중직을 모두 가지셨다는 것은 예수는 하나님이시다는 의미이다. 위의 둘째의 의미와 같은데, 예수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존재라는 것은 곧 그분은 하나님이시다는 고백을 담고 있는 것이다.

 

아론과 멜기세덱의 연결성

예수안에 있는 이 2가지 속성, 아론와 멜기세덱의 긴장속에 분명히 HumanityDivinity가 대조 되지만, 놀랍게도 깊은 연결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7-9절은 어떻게 그가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존재라고 칭함을 받게 되었는지 설명하고 있다. 7육체에 계실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8-9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셨으며”, 그 순종을 통해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며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함을 받게 되었다고 진술하고 있는 점이다.

이것을 오해하면, 인간의 고행과 종교적 인내로 신성을 취하게 되었다는 말이 된다. 그러면 곰이 여자가 된 것이다. 이것은 연약한 인간이 고행과 수련을 통해 신성을 획득하고 온전함을 성취하게 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완전한 하나님이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 고통의 자리로 들어오는 결단을 통해 온전함을 취하셨다는 의미이다. 이미 예수는 성자로서 신성을 가진 존재였다. 하지만, 구원자로서 온전한 구원의 근원이 되는 자기역할을 완전히 이루기 위해 오히려 인간의 연약함과 고통을 완전히 공감하는 과정을 거침으로 온전하게 되었다는 의미가 더 정확할 것이다.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온전한 구원의 근원이 되기 위해 예수는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와 소원을 올리는 과정을 통해 철저하게 연약한 인간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예수를 통해서 우리는 질적으로 우리와 다른 위대한 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연약함을 공감하고 이해하시기 위해 심한 통곡과 눈물을 쏟았던 사랑의 하나님의 처절한 몸부림을 본다. 기억하자. 구원자는 연약함이 전혀없는 완벽한 전능자가 아니라 구원자는 연약함의 허리케인에 휩싸여 심한 통곡의 눈물을 쏟으며 고난을 통한 순종의 길을 걸어간 상처입은 치유자가 참된 구원자이다.

 

멜기세덱과 나는 무슨상관인가? 

이렇게 멜기세덱과 예수님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큰 깨달음을 얻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이것을 깨닫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렇다면 멜기세덱과 나는 무슨 상관인가?

멜기세덱은 왕같은 제사장이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이 멜기세덱의 정체성을 연약한 인간인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축복하셨다는 점이다. 벧전 2:9은 너는 택한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라고 우리를 동일하게 축복하고 있다. 예수를 멜기세덱의 반차로 세우신 우리 하나님은 또한 당신의 자녀드인 우리에게도 그처럼 아름다운 가치와 존귀한 축복을 허락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이 존재론적으로 우리가 메시야가 되고 신이된다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처럼 연약함의 태풍속에 처절한 통곡을 쏟는 우리들을 그렇게 존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세상속에서 작은 예수로서 우리 속에 빛나는 하나님의 신성을 드러내며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달을때 우리는 진정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의 질문에 답하는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우리를 세상 가운데 보내셔서 예수가 먹고, 예수가 말하고, 예수가 일하는 모습을 우리를 통해 보이고 싶으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기 속에 빛나는 이 위대한 가치를 모르고 살아선 안된다. 멜기세덱은 예수를 설명하는 예표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 속에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가치와 기대가 녹아들어있다. 이것은 결코 부담이 아니라 우리의 영광이다. 그 영광스러운 직분을 누리는 삶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