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설교

히브리서 9장 1-11절 / 새언약은 옛언약을 긍정하고 부정합니다.

양치는선비 2010. 7. 16. 15:39

생명의삶 QT노트 / 송병주 목사 (선한청지기교회)

 

1. 옛언약은 새언약을 통해 개혁되어야 합니다.

먼저 정리할 것은 옛언약과 새언약은 연결되어 있다. 새언약은 옛언약과 아무런 상관없는 전혀 새로운 것이 도입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옛언약은 실체는 아니지만 그림자로서 새언약을 바라보게 만들며 연결성을 갖고 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은 단순히 과거를 부정하는 것만이 새로운 시작을 만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로부터 단절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연속성을 잊어선 안된다.

하지만, 옛언약과 새언약이 연속성을 갖는다고 해서 옛언약이 새언약을 종속하고 지배하는 구조가 되어선 안된다. 옛언약과 새언약은 연결되었지만, 새언약이 옛언약을 개혁하고 완성하는 구조가 성경적 원리이다. 10절은 옛언약은 개혁할때까지 맡겨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므로 옛언약은 이제 개혁의 때가 되었으므로 적극적으로 새언약을 통해 완성되고 성취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히브리서는 특별히 끊임없는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적 사고가 기독교적 가치를 포섭하려는 시도에 대해 그건 아니잖아를 강력하게 도전하는 말씀이다. 바리새적인 율법주의 가치는 새로운 언약 공동체 역시 유대교의 한 분파로 만들어 버릴 것처럼 율법주의적 행위를 지킬 것을 요구했다. 할례를 받는 문제, 먹어야 할 것과 먹어서는 안될일 등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형태상으로까지 육적 유대인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너무 강했다. 이에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명확한 방향을 제시함으로 유대주의의 물타기 작전에 대해 선을 분명히 긋고자 했다.

옛언약과 새언약이 연속성을 갖고 있음을 잊어선 안되지만, 옛언약이 새언약을 오염시키는 일은 절대 막으려 했다. 오히려 옛언약은 반드시 새언약을 통해 적용되고 개혁되어야 한다는 방향을 분명하게 제공하고 있다. 노창수 목사는 전통주의는 살아있는 자들의 죽은 신앙이고, 전통은 죽은 자들의 살아있는 신앙이다고 말한다. 십자가의 복음은 율법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변혁하여 완성한다.

새언약은 연속성을 잊어서도 안되며, 개혁의 사명을 잊어선 더더욱 안된다. 옛언약이 개혁의 대상이 되는 불편을 즐거워하고, 새언약이 연속성을 이해하는 불편을 즐거워할때 새언약의 개혁은 하나님의 은혜가 될 것이다.

 

2. 새언약은 육체의 예법의 한계를 넘어 양심을 온전케합니다. 

그렇다면 새언약의 개혁은 어떤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가?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은 새언약은 가시적인 외적 변경을 열매로 얻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구나 떠올리 듯이 새로운 시작은 새로운 형식의 시작이라고 여길 수 있다. 하지만, 오늘 히브리서는 새언약의 개혁이 그런 외적 변화가 아니라 내적 변화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10절을 보면, 옛언약은 먹고 마시고 씻는 것과 같은 외적 의식 곧 육체의 예법과 관련이 있고, 9절에서 보는 것처럼 양심을 온전케 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새언약의 개혁은 육체의 예법에 대한 형식적 개혁이 아니라 양심을 온전케하는 개혁인 것을 보여준다. , 형식의 종교를 마음의 종교로 개혁하는 것이 새언약의 열매라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이 새언약의 개혁에 어떤 형태의 외적인 변화가 없다는 말은 절대아니다. 필연적으로 새술은 새부대에 담게 되어있고 외적변화는 필연적으로 동반하게 되어있다. 그렇다면 이 의미는 아무런 외적인 변화가 없어야 된다는 말이 아니라, 외적 변화가 필연적으로 동반될 수 밖에 없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본질적인 내적 변화라는 것이다. 제사가 예배가 되고 제사장이 목사가 되며 성전이 교회가 되는 것도 동반되지만, 영혼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참된 연인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번에 새로운 차세대 담임목사가 목장 확 갈아 엎는데…”라는 형식적 변화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가 소그룹 사역과 우리의 교제방법에 대한 마음 가짐을 완전히 바꾸어야 할때가 된 것같아.”라고 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 형식이 변화가 목적이 절대 될 수 없다. 형식의 변화를 통해 지금까지 익숙했던 우리가 익숙했고 편안했던 관점에 전환점을 마련하는 것이 목표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개혁이 기대하는 진정한 열매이다. 

 

맺으며

새언약은 옛언약을 긍정으로 출발해서 부정으로 완성한다. 왜나하면, 연결성을 갖지만 변혁해야 하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오랜 세월 히브리적 가치와 유대인들의 열정을 용납한다. 그리고 그들이 익숙한 언어와 방식으로 공감대를 이루는 노력에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그렇다고하여 복음이 만들어낼 수 밖에 없는 변혁의 강한 열정을 결코 약화시키지도 않는다. 히브리인들의 히브리적 사고에 다가가기 위한 눈물어린 노력과 그 사고의 틀을 넘게 하려는 히브리서 기자의 위험한 시도가 아름답게 공존하는 것을 본다. 바라기는 섬기는 교회안에 이 두가지 긴장이 아름답고 건강한 균형으로 자리잡아가게 되길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