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설교

예레미야 13장12-19절 / 교만과 영광

양치는선비 2010. 5. 7. 04:04

두란노서원 생명의삶 QT노트 

 

술취함과 허세

 

나는 술에 취해본적이 없다. 그래서 술취한 사람들의 기분을 실감나게 이해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술을 먹지 않는 친구를 둔 동창들은 항상 술을 먹을때면 나를 불러냈다. 그리고 꼭 술값 계산을 맡겼다. 그리고 예수 잘믿는 친구가 있으니 참 좋다고안주를 너무 먹는 것 빼고는…” 그때 친구들의 술에 취해 있는 모습은 현실로부터 잠시 벗어나고 싶은 도피임을 발견한다. 술이 깨면 현실로 돌아오는 것을 알지만, 한순간이라도 술을 의지하여 현실을 외면하고 싶어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래서 술에 취하면 허세가 넘친다. “돈이 없어 카드가 없어 배짱이 없어물론 그 휴유증은 심각하다. 술취함은 허세와 만용을 낳고, 그 결과는 텅빈지갑과 터질것같은 청구서다. 술취함은 결국 교만을 낳고 그 교만은 황폐함을 만든다.

그리고 술에 취하면 사람들이 잘 싸운다. 남자들이 하는 말이 술한잔 먹으면 다 용서하고 친해진다는 말은 10번중에 한번의 진실이지 거의 대부분은 술만 먹으면 부딪히고 싸운다. 숨겨진 분노와 자존심을 내세워서 술기운 빌려 허세부리고 싸운다. 부모에게 대들고, 형제지간에 비난하고 욕하고명절때마다 술때문에 생기는 일들이다. 그래서 술에 취해 오만과 만용과 객기를 부리고 나면 남은 것은 깨어진 관계와 전쟁터같은 집이다.

 

포도주와 교만

 

이런 교만의 황폐함이 술취함처럼 유대에 있었다. 오늘 본문은 이 술취함의 비유를 통해 일어나는 유대의 영적인 피폐함을 잘 설명하고 있다. 13-15절을 보자. “너는 다시 그들에게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에 보라 내가 이 땅의 모든 주민과 다윗의 왕위에 앉은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예루살렘 모든 주민으로 잔뜩 취하게 하고 또 그들로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되 부자 사이에도 그러하게 할 것이라 내가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며 사랑하지 아니하며 아끼지 아니하고 멸하리라 하셨다 하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는 들을지어다, 귀를 기울일지어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

여기서 나타난 유대의 상태는 무엇인가?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주민들이 술취함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태에서 왕, 제사장, 선지자, 주민들이 피차 충돌하여 상하게 하고, 심지어 부자사이에도 충돌과 상하게 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한다. 타락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추락하는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유대를 무너뜨릴 술취함은 포도주는 무엇일까?

15절은 우리에게 이 술취함이 바로 교만의 문제였음을 보여준다. 유대를 징벌하게 된 그 빙거가 바로 온 나라안에 가득한 교만이었고, 그래서 선지자는 추상같은 메시지로 교만하지 말지어다함으로 교만충만의 길을 떠날 것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 제사장, 선지자, 모든 주민까지 언급하며 얼마나 깊은 영적교만이 전방위적이었는지 설명하고 있다. “교만하지 말지어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라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직접적인 표현이 성경에 많지 않은데, 얼마나 그 교만이 깊었는지 너무나 강렬하게 들으라 귀를 기울이라 2번이상 강조된 표현과 함께 도전하신 것이다. 교만의 충만! 그것이 바로 한 공동체와 교회를 파괴하는 가장 위험한 공격이다.

교회 건축이 큰나고 큰 교회가 되고 성도들이 많아질때 목회자나 평신도 리더들이 무너진다. 개척때 그렇게 성실하고 아름다웠던 목회자나 성도들이 건축끝나고 대형화되면 목에 힘이 들어간다. 이럴때 교회는 무너지고 깨어진다. YWAM의 로랜 커닝햄은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를 이메일로 나눈 적이 있다. 유대가 빠진 교만함의 포도주가 한국교회를 가득채우고 있지 않는지, 그래서 자신의 현실을 보지 못한채 허세와 만용으로 심판을 자초하고 있지 않는지 심각한 성찰이 필요하다.

 

교만의 극복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

 

그렇다면, 어떻게 교만을 극복할 수 있는가? 교만하지 않는 삶은 소극적 교만 Pause가 아니라 반드시 적극적인 행동을 요구한다. “전 절대 교만하지 않습니다…” 하고 서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교만하지 않는 삶은 정적인 상태로 실현되 것이 아니라 동적인 행위로서 실현된다. 이에 대해 예레미야는 16절을 통해 교만하지 않는 삶이 무엇인지 잘 설명한다.

바로 너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이다. 교만을 멈추는 것이 교만하지 않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영광을 돌리는 삶이 진정으로 교만을 극복한 삶이다. 교만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 교만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는 것이 교만을 극복하는 삶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신이 취할 영광을 내려놓는 것이 교만을 극복하는 삶이다. 다시 말하면 교만의 포도주를 제거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 곧 다른 포도주로 우리를 다시 가득채우는 것이 교만을 극복하는 삶이다.

교만이 싹틀때 우리는 하나님께 가는 영광조차 아깝다. 그래서 하나님께 돌릴 영광조차 취하고 싶어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하지 못해서 징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잘하는 능력으로 하나님의 영광조차 취하고 싶어하는 교만의 독주에 빠질때 징벌하시는 것이다. 우리 공동체나 교회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차고 넘쳐야 한다.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와 모든 주민이 하나님께 영광돌리기 위해 하나되고 노래하는 꿈을 우리는 꾸어야 한다. 심판의 빙거는 범죄의 죄질이 문제가 아니라 깊게 자리잡은 인간의 교만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멸망하는 유대의 그 교만으로 인해 은근히 곡하게 될 것이라고 17절에서 말한다. 멸망으로 인해 소리내어 우는 부르짖음보다, 비밀스럽게 흐느끼는 이유는 바로 유대의 교만, 자기 pride 때문이었다. 우리가 유대인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인데그렇게 여기는 그 pride가 자신들을 멸망으로 이끄는 것을 본다. 그의 비밀스러운 흐느낌은 안타까움이며 아픔이다. 왜냐하면 유대가 은혜를 저주로 바꾸었기 때문인 것이다. 성령님의 음성을 듣는다. “너의 자랑이 너를 망하지 않게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