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설교

호세아 7장: 세련되게 지은 죄일뿐

양치는선비 2013. 7. 24.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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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세련되게 지은 죄일 뿐


송병주 목사 (선한청지기교회)



세련되게 지은 죄일 뿐


<오션스 11> 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미국 최고의 유명한 배우들 11명이 나와서 라스베가스 지하금고를 터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멋지게 작전을 짜고 최첨단 장비와 고도의 심리학과 지능싸움을 하는데, 거기다가 다들 어떻게 잘 생기고 미인인지, 나도 거기에 끼워줬으면 하는 마음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내가 들어가면 <오션스 12>가 될텐데... 12사도중에 하나가 될 것처럼 여겨지더군요. 하지만, 결론은 무엇일까요? 도둑놈들입니다. 브래드 피트가 나오고, 조지 클루니에, 맷 데이먼, 그리고 줄리아 로버츠가 나와서 아무리 Cool 하고 멋지고, 첨단장비, 지능, 외모, 연기, 모든 면에서 천재적입니다. 하지만, 결국 세련되게 지은 죄일 뿐 도둑놈들입니다. 


어쩌면 예수님을 알고 나서 우리의 모습이 오선스 11의 이 도둑들과 같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를 알지 못할때 우리는 원색적인 죄인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가며 종교적인 삶의 방식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새로운 죄가 시작됩니다. 바로 “세련되게 짓는 죄” 오션스 11의 죄가 시작됩니다. 쿨합니다. 멋집니다. 험하고 징글맞지 않습니다. 흉터자국도 없고 건들거리지도 않으며 욕설도 잘 쓰지 않습니다. 명품 옷과 좋은 차를 타고 얼마나 세련된지 모릅니다. 하지만, 세련되게 짓는 죄일 뿐 속은 본질은 동일한 죄입니다. 


목사인 저부터 신앙생활 오래하다 보면, 험하게 죄를 짓는 일은 왠만해서는 잘 하지 않습니다. 제가 Nogales 길에서 접촉사고로 멱살잡고 욕설하며 싸우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Colima 길에서 술먹고 길바닥에서 술주정하는 일은 여간해서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련되게 굴면서 자신의 욕망과 야망을 신앙적인 거룩한 것으로 둔갑시키며, 속으로 정죄하고 판단하며 미워하는 죄에는 익숙해질 수 있습니다. 종교생활에 익숙해지는 만큼 노골적이거나 원색적이진 않지만, 세련되게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기독교적인 문화와 교회 화법에 익숙해지면서 우아하게 느릿느릿 말하기 시작합니다. “안녕하세요? 집사님. 참 좋네요. 은혜 많이 받으셨어요. 사랑합니다. 할렐루야~” 솔직히 거룩해 진 것이 아니라, 70년대 음악 다방에서 “오늘은 왠지~”하던 DJ 말투와 더 비슷한 것 같습니다. ^^ 기독교 문화에 익숙해졌으면서 거룩해진 것처럼 스스로 속이며 세련된 모습으로 죄지어가는 모습이 우리안에 존재합니다. 너무 세련되어서 스스로 그것을 죄로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지요. 잡범은 아닌데 대도로 변해갑니다. 아시죠? 잡범 보다는 대도가 더 세련될 뿐입니다. 똑같은 도둑놈입니다. 세련되게 지은죄라고 해서 죄가 더 예뻐지는 것은 아닙니다. 


호세아는 특별히 원색적인 죄보다는 세련된 죄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예언했습니다. 유대인들이 매우 종교적인 것처럼 하면서 살아가는 위선과 거짓을 가장 통렬하게 회개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겉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는 것들입니다. 신앙생활 나름 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망할 것이라고 말해야 했습니다. 참 어렵습니다. ‘적절한 영성’을 추구하는 것과 ‘영적 적당주의’는 참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균형잡힌 신앙생활’을 하는 것과 ‘세속주의에 물든 신앙생활’을 구별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아프고 어렵지만, 자신이 속내가 들통나고 폭로되어야만 합니다. 세련된 죄를 회개하라고 외치는 가장 어려운 메시지였지만, 호세아는 타협없이 선포했습니다. 오션스 11 같은 죄의 이야기, 세련되지만 결국 죄인 우리의 모습을 호세아 7장을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달궈진 화덕 같은 우리


세련되게 짓는 죄에 대한 첫번째 비유는 “달궈진 화덕”입니다. 4절, “그들은 달궈진 화덕같도다.” 6절, “그들의 마음은 간교하여 화덕같으니”라고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가슴속에 간음의 불덩어리, 거짓과 술수의 불덩어리, 욕망과 야망의 불덩어리를 품고 사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매우 영적이고 종교적인 것처럼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이런 화덕을 품고 있다는 것입니다. 매우 이중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중적인 모습이 얼마나 간교하게 나타나는지 3절과 7절을 대조시켜주고 있습니다. 3절, “그들이 그 악으로 왕을, 그 거짓말로 지도자들을 기쁘게 하도다,” 그런데 7절을 보면, “그 재판장들을 삼키며 그들의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하며” 달궈진 화덕 같은 이스라엘은 2가지 상반되는 행동을 합니다. 필요하면 ‘악으로 거짓말로 왕에게 아첨을 하면서, 동시에 필요없으면, 분노의 불이 되어서 그들을 삼키고 죽여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6절은 화덕 같다는 말 앞에, “그들은 간교하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안에 무섭게 가득한 죄는 바로 “간교함의 화덕”이었습니다. 필요하면 앞에가서 아첨과 칭찬의 불을 올리고, 필요 없으면 불태워 죽여 버리는 이중성을 가진 그런 간교함의 화덕입니다. 


이것은 실제 이스라엘 역사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여로보암 2세(주전 781-745) 사후부터 주전 72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할 때까지 전개된 이스라엘 내부의 정치적 혼란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여로보암 2세 이후 6명의 왕이 세워졌으나, 그 중 4명의 왕들이 재임중에 모두 암살 당하는 암흑기를 반영합니다. 스가랴 왕은 6개월만에, 살룸은 1개월만에, 브가히야 1년, 베가는 3년을 넘기지 못하고 모두 암살 당했습니다. 모두가 왕하 15:8-31까지 보면, 하나님 보시기에 악했고, 그래서 반역이 일어나 암살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이죠? 나름 이유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악한 왕이다. 그래서 죽여도 된다. 이것이 하나님 뜻이다.” 마치 예후가 아합을 죽일때 얻은 정당성처럼, 이렇게 정당성을 얻고 나서서 죽여 버립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악하다는 이유가 있었지만, 정작 자신도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가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악한 길을 간다는 것이 이유로 삼았지만, 그것이 결국 그것은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고 말하지 않는 쿠데타와 독재자가 있을까요? 시대적 소명을 말하지 않고, 왕을 죽이는 역모를 꿈꿀 사람은 없습니다. “내가 왕이 되고 싶어서 그랬다. 어쩔래?” 하며 자신의 욕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등장하는 역모와 쿠데타는 없습니다. “시대가 나를 원했을 뿐이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길을 빙자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고, 아첨하다 죽이는 이중적인 불덩어리를 품은 모습, 그것이 바로 간교한 화덕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이 간교함의 화덕은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을 내세우지만, 구실일 뿐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라고 말을 하지만, 결국 구실일 뿐입니다. 내가 한 자리하고 싶은 욕망일 뿐 이면서 명분과 구실을 찾습니다. 시대적 소명이라고 하지만, 하나님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교묘하게 대의명분을 내세우지만, 나의 욕망을 위해, 내 상한 기분과 감정을 위해, 내 뜻대로 주무르고 움직이기 위해 불타오르는 간교함의 화덕이 존재합니다. 


겉으로 아첨하지만 속으로는 때가오면 삼켜버릴 준비를 하고 있는 화덕말입니다. 겉으로 하나님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나의 욕망을 위한 화덕 말입니다. 겉으로는 열정의 불꽃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욕망의 불꽃인 바로 그 화덕 말입니다. 상한 감정과 분노와 욕망으로 가득한 꺼지지 않는 화덕,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을 향한 열심인 것처럼 속이는 바로 그 화덕 말입니다. 


그래서 도전합니다. 화덕을 품고 살지 마시고, 성령의 불을 안고 사시게 되길 바랍니다. 화덕은 상대를 죽이고 소멸시키는 불을 품습니다. 하지만, 성령은 내 속의 죄를 소멸하는 불꽃입니다. 이열치열이라고 하죠. 욕망의 화덕, 앙심의 화덕, 복수의 화덕을 이기는 것은 성령의 불을 받아야 합니다. 성령의 불이 그 달궈진 화덕을 제어하고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가슴 속에는 두가지 불 덩어리가 싸우고 있습니다. 때로는 비슷해 보여서 헷갈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심인지 착각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다릅니다. 내 가슴속에 요동치는 것이 ‘뜨거운 성령’이십니까? 아니면, ‘달궈진 화덕’입니까? 여러분은 그 불덩어리들 중 어디에게 불쏘시개를 공급하고 있으십니까? 화덕을 버리고 성령을 붙드십시오. 그것이 우리를 승리케 하실 줄 믿습니다. 


<Naver Blog 인용>


뒤집지 않은 전병 같은 우리


세련되게 짓는 죄의 두번째 모습은 “뒤집지 않은 전병”입니다. 7:8절을 봅시다. “에브라임이 여러 민족 가운데에 혼합되니 그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뒤집지 않아서, 겉보기는 멀쩡해 보이는데, 아래는 새까맣게 다 타버린 존재라는 것입니다. 먹지 못할 것인데, 먹음직스러워 보인다는 것입니다. 쓰지도 못할 것인데, 쓸만해 보인다는 것입니다.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는 말을 8절은 무엇으로 설명합니까? 바로 “여러 민족 가운데 혼합되니”입니다. 이 말은 부요와 성공을 위해 바알과 아세라를 하나님과 겸하여 섬기는 모습을 말합니다. 양치는 산업과 안식일 종교생활은 여호와가 필요하고, 농사짓고 부자되는 일에는 바알과 아세라가 필요하다는 이중적인 삶입니다. 이것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잘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혜로운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한쪽은 우상숭배로 새카맣게 타 죽었는데, 한쪽면은 여호와를 잘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습을 바로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한쪽은 세상을 사랑하고 살면서, 한쪽은 율법과 제사를 드리고 산다고 해서 괜찮은 것처럼 착각하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은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한쪽만 새카맣게 타버린 전병이나, 양쪽 다 타버린 전병이나 못쓰는 것은 똑같습니다. 허우대만 멀쩡해 보일 뿐입니다. 속이 다 죽었는데도 뒤집어지지 않은 전병... 이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그래서 이 뒤집는 전병을 7:10은 “교만”이라고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드러났나니 그들이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도다.”


세상 붙들고 사는 것이 죄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그것이 지혜로운 것처럼, 우리가 잘 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교만의 고집에 빠져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 타들어가고 있는데, 속으로는 다 죽었는데, 겉으로 허우대가 멀쩡하니 괜찮은 것처럼 생각하는 모습입니다. 이 모든 일을 당하여도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지 아니하며 구하지 아니하며 버티는 모습을 말합니다. 여전히 세상이 하나님 보다 더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습입니다. 속은 시커멓게 죽었는데, 아직도 겉모습만 믿고 버티는 모습을 말합니다. 세상적으로 살다가 그렇게 당하고 무너져도 하나님께로 안 돌아오고 세상 붙들고 사는 모습입니다.


내 안의 뒤집지 않은 전병같은 모습을 찾으셔야 합니다. 부르짖어야 하는데, 로비만 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뒤집어야 하는데, 고집스럽게 버티는 내 모습을 봐야 합니다. 겉모습 보면서 죽어버린 속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주님 지금 도전하십니다. “뒤집어져야 한다. 빨리 뒤집어라! 언제까지 그렇게 고집할래. 신념이냐? 아니면 고집이냐? 옳은 길이기에 가는 것이냐? 아니면 네 상한 감정 때문에 꼬장을 피우는 것이냐?”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생각하지 않고, 내 생각과 감정대로 가는 길은 뒤집지 않은 전병의 길입니다. 지금 이 모습이 주님이 원하시는 것일까요? 아니면 내 생각과 감정이 원하는 것일까요? 한쪽이 시커멓게 타들어가고 있는데도 버티는 것은 고집과 신념이 아니라 교만입니다. 


감정의 전병이 뒤집어 지시기 바랍니다. 생각의 전병이 뒤집어 지시기 바랍니다. 의지의 전병이 뒤집어 지시기 바랍니다. 숨겨진 내면을 다 태워버리면서 겉은 멀쩡하다고 스스로 속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내 생각과 감정과 고집, 그리고 어떤 주의(ism) 에 빠져서 끝까지 my way를 고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이중적인 것입니다. 



어리석은 비둘기 같은 우리


세련되게 짓는 죄의 3번째 이미지는 ‘어리석은 비둘기’입니다. 11절,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아서”라고 합니다. 어리석은 비둘기가 무엇을 말할까요? 바보처럼 멍 때리고 있는 그런 비둘기일까요? 눈앞에 고양이가 발톱을 들고 떼로 덤비는데, 도망도 안가고 모이 먹으며 I am happy 하고 있는 새 대가리(?)같은 모습을 말하는 것일까요? 여기서 어리석다는 말은 넋놓고 있는 그런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살려고 몸부림칩니다. 살려 달라고 소리지릅니다. 독수리의 날카로운 발톱이 자기를 찍으려 하자, 미친듯이 퍼덕거리고 날개짓하며 살 길을 찾습니다. “구구구” 하며 필사적으로 살려달라고 울부짖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방향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십시오.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앗수르로 가는도다.” 무슨 말입니까? 구슬프게 울부짖기는 하는데, 살려고 퍼덕거리는데, 그것이 하나님이 아니라 애굽이고 앗수르라는 것입니다. 


머리를 쓰지 않는 것도 아니고, 애를 쓰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머리쓰고 지혜를 짜내는 데 그것이 자기 머리만 믿고, 강대국을 의지하지, 하나님 앞에 나가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지혜를 믿고 교만한 자들이 결국 어리석은 자가 된다는 말입니다. 앞의 뒤집지 않은 전병이야기와 연결됩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짝하는 것은 겉으로는 지혜롭고 교만해 보이나, 결국은 어리석은 모습이라는 의미입니다. 바보는 바보짓을 하지 않습니다. 똑독하고 교만한 자들이 꼭 바보짓을 합니다. 


케네디 대통령시절 미국 최고의 전문가들과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서 쿠바 상륙작전을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가장 어리석은 작전이 바로 피그만 상륙작전이라고 하죠. 자기 머리를 과신하고, 불가능도 가능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교만이 결국 가장 바보같은 결정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스라엘도 열심히 머리 썼습니다. 이 위기에서 누가 우리를 구해줄까? 그리고 최선을 다해 부르짖습니다. 찾기는 찾습니다. 장고끝에 악수라고, 그 지혜와 교만이 결국 가장 어리석은 비둘기가 되게 한 것입니다. 


우리 안에 이 어리석은 비둘기를 찾아야 합니다. 부르짖고 열심히 찾아갑니다. 그런데 항상 하나님은 아닙니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 문제가 아닙니다. 열심히 합니다. 그런데, 방향이 문제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원론적으로는 유신론자이나, 방법론에만 들어가면 무신론자가 되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해보려고 합니다. 남 도움을 받아 보려고 합니다. 그래도 안되면 절망해버립니다. 열심히 만나고 해결하려고 애쓰고 부르짖고 호소합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자기 머리와 능력, 그리고 네트워크만 신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도움도 요청을 하긴 합니다. 하지만, 내가 하는 일에 내 방식으로만 도와달라고 합니다. 애굽과 잘 되게 해달라고, 앗수르와 잘 되게 해 달라고 부탁할 뿐입니다. 그건 결국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이 아닙니다. 


부르짖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만 제외하고 부르짖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큰 착각중에 하나는 하나님을 떠나면 안 부르짖고 살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 땅을 사는 사람들이 정말 부르짖지 않을까요? 이 세상에 부르짖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통과 인생의 위기가 오면 지푸라기라도 붙드는 것이 인생입니다. 단지 하나님만 빼고 부르짖을 뿐입니다. 세상에 무신론자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부신론자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혐오하고 미워하는 혐신론자가 있을 뿐입니다. 


굉장히 지혜로운데, 실상은 어리석은 비둘기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뻣뻣하고, 세상을 향해서는 굽신거리는 비둘기입니다. 세상을 향해 울부짖으면서 하나님께는 절대 부르짖지 않는 비둘기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자존심이 가득하고, 세상을 향해서는 자존심도 간도 쓸개도 빼버린 비둘기를 말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facebook 친구 5천명도 아니고, twitter의 followers 1만명 10만명 늘리는 것이 아니라, 단 한분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수십만명의 네트워크를 바라봐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한분만 바라 봐야 합니다. 어리석은 비둘기는 한분 하나님이 아니라, 내 능력과 네트워크를 의지하는 엉터리 지혜와 교만입니다. 그 어리석은 비둘기를 찾으십시오.   



마음을 원하십니다. 인애와 성심


제 자신을 많이 돌아봅니다. 세련되게 짓는 죄에 빠지기 가장 빠지기 쉬운 유혹에 가장 빠지기 쉬운 사람이 저와 같은 목사입니다.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이나 하나님과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미움과 시기심으로 가득차 있으면서 정의와 바른길을 말하는 제 모습에 하나님이 얼마나 역겨우실까 생각하게 됩니다. 지기싫어서 자존심에 벌벌 떨고 있으면서, 야망과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라고 할때 얼마나 역겨우실까 생각해봅니다. 


이번에 뉴저지 집회에 가서 울보 전도사님을 만났습니다. 너무 젊은 나이에 담임전도사가 되어 눈물로 사역하는 목사님...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깊은 고민을 했습니다. “나에게 저 마음이 회복되어야 할텐데... 적당히 순수하면서 적당히 때묻고, 적당히 영적이면서, 적당히 세속적이고... 그렇게 변해가는 사람 되지 않아야 할텐데, 십자가 붙들고 눈물이 많아야 하는데...” 나에게 그런 조짐이 틈타지 않기를 구하며 기도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돌아보니 설교도, 기도도, 때로는 습관적으로 준비하는 제 모습을 발견하고 놀랐습니다. 형식적으로 드리는 새벽기도회, 일어나기 싫어서 버티는 제 모습을 봅니다. 새벽기도 가서도 헛 바람 잡는 것 같은 기도가 있더군요... “주여~”하며 나도 모르게 넣는 추임새... 주님을 불렀지만, 의성어라는 것을 알겠더군요. 찬양하며 손을 들고 있지만, 가슴이 아니라 습관에 익숙해져버린 제 모습도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주님 제 마음을 때리셨습니다. “너는 네가 날 위해 무엇을 했는지 말하고 싶어 하는데, 나는 너의 마음을 원한다.”


성도 여러분 가장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자기 고집이 가장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항상 자기를 작게 여기며 겸손한 사람이 가장 자기 의가 강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가장 성령충만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 성깔이 가득 배여 있을 수 있습니다. 가장 바르고 반듯하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율법주의에 빠져 타인을 향한 정죄감으로 가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형식의 종교가 아니라, 마음의 종교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뜨거운 목소리가 아니라, 뜨거운 가슴을 원하십니다. 바른생활을 원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순전한 마음을 원하고 계십니다. 가슴을 드린 신앙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주님 원하시는 것은 단순합니다.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하노라.” 7:14 “성심으로 나에게 부르짖으라” 무슨 말입니까? 이들이 신앙생활 안했다는 말이 아닙니다. 열심히 제사 지냈습니다. 열심히 번제도 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고 집회도 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받지 않으십니다. 마음의 변화 없이 번제 드리고 형식적인 제사만 열심히하는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을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옷을 찢는 회개가 아니라 마음을 찢는 회개를 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 왕을 바꾸는 혁명을 원하고 계신 것도 아니고, 외교전략와 대외정책을 구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드리는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혁명보다, 탁월한 외교전략 수립보다 어려운 것이 내 진실한 마음을 드리는 것 입니다. 세상을 뒤집는 것보다 내 마음 뒤집기가 어렵지요. 이스라엘의 왕을 6번을 바꿀 수 는 있어도 내 마음의 왕은 단 한번도 바꾸기 어렵습니다. 국가의 운명을 결정하는 외교전략은 잘 수립하지만, 한분 하나님과 외교관계를 맺는 일은 죽어도 못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내 마음의 왕을 향한 역모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세상 나라 네트워크가 아니라, 하나님과 외교관계의 회복입니다. 마음을 뒤 집는 혁명, 내 마음의 자아라는 왕을 향한 역모를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세련된 죄로부터 빨리 벗어나십시오. 원색적인 죄를 짓지 않는다고 속지 마십시오. 세련된 죄일수록 하나님을 더 역겹게 할 뿐입니다. 우리에게는 죄의 세련미가 아니라, 회개의 순수미가 필요합니다. 달궈진 화덕, 뒤집지 않은 전병, 어리석은 비둘기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입술이 아니라 가슴으로 부르짖으십시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세련된 죄’만큼이나 ‘세련된 회개’를 역겨워하십니다. 성도들의 세련된 죄와 세련된 회개에 지칠만큼 지쳤습니다. 하나님은 세련된 회개가 아니라 ‘원색적인 회개’를 원하십니다. 성심으로 가슴을 치며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진실한 회개는 왕을 6명 바꾸는 혁명보다 위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