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설교

호세아 강해 5:4-6:3 "여호와께로 돌아가자와 진정성"

양치는선비 2013. 7. 9. 15:07

호세아 6장1-3절

여호와께로 돌아가자와 진정성


송병주 목사 (선한청지기교회)



심판과 징벌의 두 얼굴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우리는 볼멘 반응을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직접 당신의 백성들을 치실 수 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심판의 상황 관련되어서 살펴보게 되면, 2가지 특징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핍박하는 대적자들에게는 직접적인 공격을 실시하십니다. 예를들어 아말렉을 향한 하나님의 공격, 특별히 소돔과 고모라에는 유황불을 쏟아 버립니다. 그리고 애굽의 경우에는 10가지 재앙으로 하나님이 직접 진두지휘 하시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대적자들에게는 철저한 타격과 공격을 감행하십니다. 

하지만, 둘째로, 패역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직접적인 공격이 아니라 자기하고 싶은대로 방치하시는 것을 봅니다. 직접적인 공격이 아니라 보호와 방어를 중단하고 자기 하고 싶은데로 되게 하는 그것이 재앙이 되고 징벌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당신의 백성을 치기 위해 애쓰시는 적이 없습니다. 애쓰며 보호하시다가 패역한 이스라엘의 소원대로 개입하지 않으면 주변 나라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하는 모양입니다. 징벌은 하나님이 직접 공격하셔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떠나셔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애써서 징벌하신 적이 없습니다. 애써서 보호하셨을 뿐 입니다. 


하나님 필요 없다는 이스라엘 


오늘 본문의 전제가 되는 5:4-14을 보면, 그 점이 더욱 뚜렸해집니다. 패역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징벌이 직접적인 공격처럼 보이나 그렇지 않습니다. “5절 넘어지리라, 7절 그 기업을 함께 삼키리로다, 9절 벌하는 날에 에브라임이 황폐하리라, 10절 내가 나의 진노를 물같이 부으리라,  11절 학대를 받고 재판의 압제를 받는도다, 13절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14절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분명히 처절한 징벌의 메시지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직접 공격처럼 보이시지요?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자세히 보면, 직접적인 공격이 아니라, 앗수르가 쓸어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15절을 보시면, 더욱 분명히 드러납니다. “그들이 그 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이게 무슨 말이죠? 하나님은 징벌을 직접 시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잠시 떠나 혼자 있겠다는 말입니다. 즉, 벌을 주고 있는 현장에서 진두 지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징벌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따로 떠나 혼자 있겠다는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명령만 내리고 천사들이 벌을 주는 것이겠지요. 똘마니 천사들이 담그고 있는 동안 보스는 딴데서 커피 마시고 있겠다 이런 말 아닙니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름 설득력이 있습니다만, 이건 조폭 영화를 너무 많이 보신 것입니다. ^^ 하나님이 조폭 두목이겠습니까? 

이것은 오히려 “나를 떠난 너희들이 내가 필요없다는 너희들이, 너희 뜻대로 마음대로 하라”고 내 버려 둔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이스라엘은 하나님 없어도 된다고 하며, 하나님을 잊어 버렸고, 하나님을 버렸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합니까? 7절, 정조를 지키지 않고 사생아를 낳았다고 합니다. 남편을 버리고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11절, 에브라임은 사람의 명령 따르기를 좋아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13절입니다. “에브라임이 자기의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의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이스라엘과 유다가 병도 상처도 깨달아 알았는데, 도움을 앗수르에게 구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앗수르를 선택하고 살려달라고 요청했다는 것입니다. 내 놓고 하나님 무시한 것입니다. “하나님 필요 없으니 우리 인생에서 사라져주세요.”한 것입니다. 


징벌은 우리의 소원대로 된 결과이다.


징벌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공격이 아닙니다. 소극적인 방치입니다. 본인들 원하는대로 두면 자동 징벌이 됩니다. 앗수르 제국, 세계에서 가장 강한 제국이었지만, 가장 무자비한 제국이었습니다. 앗수르는 경찰이 아니라 깡패였습니다. 아시죠? 깡패는 보호를 명목으로 돈을 뜯습니다. 돈 뜯는 것이 목표지 보호가 목표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호 받을 줄 압니다. 겉보기는 멀쩡한 제국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속은 탐욕의 아귀들이었습니다. 허우대가 멀쩡하다고, 속도 멀쩡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걸 보니 최근 한국의 한 사건이 생각났습니다. “175cm 이상의 키와 단정한 용모, 4년제 대학 우대, 토익과 토플 고득점일 경우 특별 incentive pay, 2년간 인턴 후 정 직원 고용, 고수익 보장” 이란 광고가 나왔습니다. 대기업 직원 모집이 아니라, 2009년에 일당타진된 이태원 파 조직원 모집 광고혔습니다. 전통적으로 조직 폭력배는 배나오고 덩치크고 문신하고 얼굴에 흉터있고 깍두기 머리입니다. 그런데 너무 티가 나서 경찰의 관심 대상이 되니까 겉보기는 아주 멋진 청년처럼 보이는 친구들이 조직을 장학하면 경찰의 관심대상도 안되니 훨씬 좋다는 것입니다. 겉보기는 멋진 청년처럼 보이는데, 속은 사시미 칼 들고 다니며 찌르고, 알루미늉 방망이로 사람 패고 다니는 깡패더라는 것입니다. 앗수르 제국이 바로 이런 모양이었습니다. 

고멜로 본다면, 창기의 포주와 같은 존재가 앗수르입니다. 고멜이 다른 남자의 연애를 받아 음란한 여자 곧 창기가 되었습니다. 그 남자는 사랑을 빙자하였지만, 음란으로 고멜을 망가뜨린 포주에 불과했습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연애의 이름으로 다가와 창기로 만드는 이가 포주입니다. 물론 지켜주고 돈도 벌게 해주겠다고 하겠죠. 하지만, 포주는 아귀입니다. 앗수르는 보호와 수입을 보장하고 다가와 다 뜯어먹고 떠난 더러운 기둥서방일 뿐입니다. 포주가 창기를 보호할까요? 포주가 창기를 보호한다는 말은 달팽이가 100m 달리기 한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유다는 그 길을 간 것입니다. “앗수르가 우리를 도울 것이다. 하나님 필요없다. 우리 끼리 알아서 한다.” 소원대로 제발로 앗수르에게 가서 처절하게 짓 밟혀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징벌하시기 위해 힘 쓰신 적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원하는대로 떠나 주셨고,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손에 운명을 맡긴 결과였습니다. 자기 소원대로 해 주는 것이 바로 징벌의 출발입니다. 그리고 그 앗수르는 보호를 명목으로 다가와 이스라엘을 다 쓸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보호할 때는 그게 은혜인줄 모르고 자기들이 잘나서 그런줄 압니다. 그래서 별로 도움 안되어 보이는 하나님 보다 좀더 센 세상에 의지하는 것이 더 나을 줄 압니다. 우리가 아무리 머리 써봐야 세상은 우리보다 훨씬 더 사악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내가 원하는대로 되는 것, 그것이 망하는 길입니다.  


차마 그 꼴 못보시는 주님


왜 15절에서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한지 아시겠습니까? 하도 “우리 인생에서 꺼지라고 하니” 소원대로 해 주셨지만, 그래도 일어날 일 생각하니 차마 당하는 꼴을 못 보셔서 가신 것입니다. 보시면서, “꼴 좋다. 이럴 줄 알았지.”하시는 것이 아니라, 쳐다보자니 마음 아파서 그냥 안 보시는 것입니다. 마치 효도 관광 여행 보내줘서 강원도 여행 다녀왔더니, 그 사이에 어머니 버려두고 해외 이민 나가 버린 자식과 같습니다. 자식을 찾아 주겠다고 이름을 말하라고 했더니, 치매 환자 행세 하셨다더군요. 자식은 어미를 버렸지만, 어미는 자식의 명예를 위해 이름을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치매 환자 행세까지 한 것이죠. 바로 그런 어머니의 이야기 같은 것입니다.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우리는 이 구절에서 사랑하는 아내의 배신에도 불구하고, 그 당할 험한 꼴을 못봐 돌아서는 쓸쓸한 뒷 모습을 알아야 합니다. 

더 황당하고 답답한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하나님 필요어요. 내 인생에서 빠져 주세요. 알아서 할께요.”하며 사시는 분들이 어려운 일 생기면 하나님 제일 먼저 원망합니다. 말은 그렇게 노골적으로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살아놓고도 자기 소원대로 살다가 안되면, 하나님이 치셨다고 원망합니다.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 책임져야죠. 이것이 우리안에 무서운 죄의 이중성입니다. 하나님 꺼지라고 해놓고, 하나님 안 도와준다고 원망하는 것 말입니다. 하나님이 징벌하신다구요? 무슨 말씀입니까? 모든 것은 당신의 소원대로 된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고 다시 하나님 원망한다면 그것은 하나님 마음 두번 난도질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하는 꼴을 못봐서, 속이 상해서 하나님은 그 자리를 피해 버리신 것입니다. 


회개는 회개인데... 


이런 징벌의 상황을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가 뭐라고 해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가야 합니다. 사람을 따르고, 앗수르를 따르며, 음행하는 것을 멈추고 하나님 앞에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읽은 본문 6:1-3은 이스라엘이 회개하는 이야기인데, “오라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자”는 회개의 메시지인데, 과연 진실한 회개일까요? 1-3절은 구국 기도회, 참회의 밤, 구국 대성회 같은 것 할 때마다 단골로 등장하는 본문입니다. 특히 한기총 목사님들이 자주 쓰시는 본문입니다. 그래서 수련회나 집회 타이틀로 참 많이 쓰이는 본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이 본문을 긍정적으로 해석해 왔습니다. 그리고 늘 특별행사 구호처럼 사용하면서 좋은 의미로 생각해왔습니다. 하지만, 문맥적으로 볼때, 아무리 봐도 긍정적으로 이해할 진정어린 회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이 본문으로 은혜 받아 오신 분들에게는 충격이 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좋은 표현이지만, 이 본문은 깊은 회개이기 보다는 어려운 일이 생길 때마다 유대인들의 상투적인 위선적인 회개 기도문을 인용한 것으로 보아집니다. 뭐와 같을까요? 요나서 2장의 요나의 고백과 거의 유사합니다. 제가 금요예배 요나서 강해할때 했던 내용입니다만, 요나서 2장의 회개기도는 깊은 회개가 아니라 ‘위선적 상투적 회개’로 가득합니다. 수사학적으로 너무 멋지게 작성되서 훌륭한 기도문인줄 알고 2장을 보시는 분이 많습니다만, 전형적인 바리새인스러운 기도로 가득합니다. 

욘 2:2을 보면,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우습습니다. 자기가 고난을 받다니요, 고난은 사명을 다하다가 핍박당할때 쓰는 말입니다. 요나는 자기 아집 때문에 사명을 버리고 도망가다 풍랑을 만났습니다. 풍랑때 회개할 기회를 주어도 바닷말에 나를 던지라며 악을 쓰던 자기 아닙니까? 바닷물에 나를 던지라는 것을 다른 뱃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희생적인 성도의 모습으로 말하시는 분도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니느웨로 가서 회개하라는 사명을 수행할 바에야 죽겠다는 말입니다. 뱃사람들이 너의 신에게 기도하라고 해도 입 다물었던 사람입니다. 풍랑은 바닷물에 자기를 던져야 했던 것이 아니라, 사명을 받겠노라 회개해야 할때 잠잠했을 것입니다. 바닷물에 던지라는 것은 자기 희생이 아니라 죽었으면 죽었지 사명을 따르지 않겠다는 아집으로 가득찬 모습입니다.   경상도 말로, “차라리 날 직이라...” 하는 분위기입니다. 이게 고난이겠습니까? 

욘 2:3을 보면,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 던지 셨으므로”하는데, 언제 주님이 던졌습니까? 앞에서도 보았지만, 누가 차라리 날 죽이라고 바다에 던지라고 했습니까? 자기가 바다에 던지라고 해놓고, 하나님이 바다에 던지셨다... 놀라운 일입니다. 

욘 2:4에서는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 났을찌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나 하였나이다.” 점입가경입니다. 요나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습니까? 자기 발로 하나님의 목전을 떠났습니까? 사명을 거부하고 회개를 거부하고 하나님과 등돌린 사람은 요나였습니다. 이 구절만 보면, 마치 자기는 버림 받았지만, 자기가 하나님 생각해서 모든 것이 회복된 것처럼 말합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쫓아 내었어도 자기가 하나님 생각하고 사모해서 잘 된 것처럼 말합니다. “내가 이렇게 요렇게 했더니, 하나님이 이렇게 저렇게 하셨다.”는 구조입니다. 사실을 호도한 상태에서 자기의 회개가 자기 의가 된 그런 모습입니다. 회개기도처럼 보이지만, 요나가 하나님 회개시키는 기도 같습니다. 

욘 2:8-9를 봐도 자기가 서원을 갚겠나이다 한 것이 큰 공로인 것처럼, 여전히 나는 저 우상 숭배자들과 다르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요나서 2장에만 1인칭 주어가 23번이 나옵니다. 완전히 자기가 중심입니다. 하나님이 말도 안되는 회개에도 불구하고, 사명을 다하겠다고 하니 받아들여준 은혜 덕택이지, 그 회개에는 진정성은 솔직히 보이지 않습니다. 물고기가 토하여 내었다고 했는데, 정말 토하고 싶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 


누가 찢었고, 누가 치셨습니까? 


오늘 내용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돌아오자, 우리가 힘써 알자.” 그러면... “하나님이 이렇게 저렇게 하실 것이다.”는 식입니다. 회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들이 만들어 놓은 공식같은 말투를 그대로 갖고 온 것입니다. 종교적인 수사는 뛰어나지만, 가슴이 담기지 않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1절의 하반절을 보면 “영혼없는 회개”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얼마나 황당한 표현인지 아시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여호와께서 우리를 치셨으나” 이게 말이 될까요?

여기서 찢었다는 말은 사자가 양을 사냥하여 찢어 벌려놓은데 쓰이는 표현입니다. 쳤다는 말도 자루속에 그릇을 넣고 가루가 나도록 바위에 친다는 말입니다. 이게 회개입니까? 죄를 하나님께 뒤집어 씌우는 것입니까? 앗수르가 찢었죠. 앗수르게 쳤죠. 그런데 그것을 하나님 책임으로 몰아 버립니다. 아들이 하도 말을 안들으니 어머니가 부탁합니다. “아들아 미래를 위해서 부탁하는데, 공부를 못해도 좋으니 학교는 졸업하자. 건강을 위해서 그러니 밤에 일찍자고 아침에 일찍만 일어나자.” 그러자 아들이 간섭 많은 집구석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집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2년동안 소식을 끊었습니다. 아들 찾던 어머니는 간신히 인생 밑바닥까지 떨어져 밥도 제대로 못 먹고 피골이 상접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평소 아들이 좋아하던 음식 챙겨 도시락 싸들고 만나러 갔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했더니, “그래요. 어머니가 나를 못 살게 굴어 쫓겨 났지만, 어머니 눈물 봐서 돌아가죠” 한다면 도시락 엎어버리고 싶지 않겠습니까? 

이건 마치 호세아 상황으롭 본다면, 딴 남자 눈에 맞아 집을 나간 고멜을 밖에 나가서 죽을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을 찾아가서 다시 사랑하며 데려 올려고 하자, “돌아가자, 내가 옛 남편에게 돌아가리라. 남편이 나를 쫒아 내었으나 나를 다시 받아 줄 것이요, 남편이 나를 찢고 때렸으나 다시 싸매어 주리라” 이러는 모양입니다. 이게 회개입니까? 영혼없는 고백이고, 상투적인 말 장난입니다. 1절 말씀으로는 하나님이 회개해야 할 상황처럼 보입니다. “찢고 쳐서 미안하다. 그런데도 돌아와줘서 고맙다.” 이래야 할 상황같습니다. 패역한 우리의 죄성은 회개하기 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찢었다, 치셨다고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건 회개가 아니라, 하나님 회개 시키기 입니다. 회개를 빙자해서 하나님을 회개시키려 하지 마십시오.


문맥적으로도 앞뒤 관계를 봐도


문맥적으로도 보십시오. 5장 끝절 15절에서 재앙과 징벌을 예언하면서 “그들이 그 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리라 그들이 고난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리라.” 뇌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피해있겠다, 즉 간절한 회개를 기다리시는 주님의 마음을 예언의 끝에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끝까지 징벌할 마음이 없습니다. “간절히 구하겠지...” 그걸 기다리는 바보 같은 사랑을 하십니다. 

그러자 6:1에서 유대인들이 외치는 모습처럼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이 만약 진실한 외침이라면 6:4부터 내용은 회복과 긍휼의 이야기가 나와야겠지요. 그런데 6:4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에브라임아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우리 말로 옮기면, “이걸 확 어떻게 해 버려야 되나?” 이런 말투입니다. “내가 찢었다고, 내가 쳤다고... 내가 도데체 너희들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 매우 부정적인 한탄이 담긴 말입니다. 속이 찢어져서 탄식하는 말입니다. 

교회 다니면서 우리도 모르게 이런 영혼 없는 회개에 익숙해 집니다. 겉보기는 겸손, 말 만 열면 나같은 죄인이, 기도만 하면 우리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이것을 들으시면서, “내가 너희를 어떻게 해야 하나?” 며 속이 터지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는 것보다 더 하나님을 아프게 하는 것은 영혼없는 회개입니다. 책임을 하나님께 미루는 것입니다. 회개를 빙자하여 하나님을 회개시키려 드는 깊은 죄성입니다. 마치 아담이 하나님이 만드신 여자를 논하며,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여자를 빙자하여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을 두번 찢어놓지 마십시오. 

그래서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오자. 하나님을 알자 힘써 하나님을 알자” 이런 표현을 내걸고 회개 집회를 열 때마다, 특히 정치성을 띈 구국 성회 하면서 한기총 관계자 같은 분들이 내거는 이런 표현을 볼때마다 저는 생각합니다. “당신들이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내가 이 한국교회를 어떻게 하랴?’ 하며 속 터지신다는 것을 가증스러워하신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런 생각이 자꾸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렇다면 이 징벌 앞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실한 회개와 고백입니다. 소와 양을 떼로 끌고와서 제사 지내겠다고 폼 잡지 말고, 상투적인 회개 용어 나열하면서 하나님이 치셨다 이런 소리 하지 말고, 진실하게 여호와께로 가슴과 눈물로 돌아와야 합니다. 엉터리 회개하지 말자고 회개안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제야 말로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어설픈 회개, 아니 회개를 빙자하여 하나님을 회개시키려는 우리의 죄성을 직면하십시오. 그리고 진실한 회개와 엎드림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1절을 조금만 바꾸십시오. 그렇다면 의미는 하늘과 땅처럼 달라질 것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우리가 예수님을 창으로 찢었으나 우리를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가 예수님을 돌로 쳤으나 우리를 오히려 싸매어 주실 것이라.” 우리가 해야 할 고백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찢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찢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채찍으로 때렸습니다. 그래서 부끄럽고 미안해서 돌아갈 수 도 없는데, 그래도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내 아들을 사자가 어린 양을 찢어 발기듯 찢어버린 자식죽인 원수인 우리를 오히려 싸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내 아들을 부대속의 그릇을 가루날때까지 바위에 때린 자식죽인 원수들을 치유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용서입니다. 

진실로 하나님앞에 상투적 회개가 아니라 돌아가십시오. 우리가 아들을 죽였어도 용서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자유가 아니라 세상의 노예가 되는 길입니다. 하나님 앞에 큰 소리치고 세상 앞에 굽신 거리는 오류는 이제 그만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유하고, 세상앞에 종속되는 인생이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 앞에서는 목소리 높이고 핏대 높이면서, 세상 앞에서 고개숙이고 비굴해 지지 마십시오.  기억하십시오. 거짓 회개를 버리고 영혼과 눈물을 담아 다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무슨 짓을 해더라도 그분은 우리를 싸매어 주시고, 다시 치유해주실 것입니다. 여호와가 우리를 찢었다고 하지 마세요. 우리가 여호와를 찢었다고 하십시오. 그것이 회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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