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설교

호세아 강해: 호세아 2장 "하나님 장가 가는 날"

양치는선비 2013. 6. 19. 03:17

호세아 2장16-23절

하나님 장가 가는 날


송병주 목사(선한청지기교회)



징벌적 사랑과 싸 메어줌의 사랑


호세아 2장은 크게 둘로 나누어집니다. 전반부 2-13절은 패역한 이스라엘을 징벌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줍니다. 반면 14절부터는 징벌이 목적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다시금 사랑의 회복이 목적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전반부를 ‘징벌적 사랑’이라고 할 수 있고, 후반부를 ‘싸 메어줌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패역한 이스라엘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징벌이 필요합니다. 사랑한다면 잘못된 길을 막아야 합니다. 그러나 징벌만으로 멈추지 말고 다시 싸메어 주어야 합니다. 이 두가지가 이루어져야 사랑은 완성됩니다. 


먼저 패역한 이스라엘의 앞길을 막아야 합니다. 6-13절은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6절, 길을 막고 찾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7절 길을 잃고 바알을 만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9절, 흉년이 들고 입을 옷도 없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11절 희락과 명절을 폐하게 하고, 12절 논과 밭을 황폐하게 만들어야 하며, 13절 벌을 주어야 합니다. 사랑한다면 먼저 길을 막고, 배 고프게 해야 합니다. 자기 머리로 자기 술수로 잘 될 수 있다는 것을 우선 막아야 합니다. 죄의 길을 간다면 막아 주어야 합니다. 죄악된 길을 가는 이스라엘을 향해 침묵하는 것은 절대 무조건적 사랑이 아닙니다. 침묵은 더 큰 죄를 짓게 만드는 공범입니다. 

그 앞길을 막는 징벌은 결코 심판이 아닙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한국의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한 어머니가 경찰서를 찾아와 울면서 아들을 고발했습니다. “내 아들을 체포해주세요. 저에게 나쁜 짓을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폭력배가 되어서 사람들을 폭행하고, 마약을 팔고, 사기를 치고 삽니다. 내 아들이 사람될 수 있도록 이 아들을 잡아주십시오.”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그 아들이 잡혀와서 “도데체 어떤 놈이 고자질을 한거야? 알면 죽여 버리겠어”하며 행패를 부릴때 어머니가 달려와서 “아들아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너를 신고했다. 제발 나쁜짓 그만하게 해 달라고 내가 다 말했다. 이제 그만해라. 어미는 다른 것 바라지 않는다. 라면 끓여먹고 살아도 떳떳하게 살고 싶구나. 이분들 원망말고 이 어미를 원망해라. 이 어미를 원망해라.” 그렇게 울부짖자 아들도 눈물을 흘리며 순순이 조사를 받더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심판이라고 해야 할까요? 사랑이라고 해야 할까요? 기억합시다. 사랑한다면, 막아야 합니다. 사랑 때문에 배고프게 하고 벌을 주어야 합니다. 징벌없는 사랑은 무조건적 사랑이 아니라 사랑이 아닐 뿐입니다. 죄의 공범이고 방조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징벌은 있지만 회복이 없다면, 그것은 처벌과 복수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징벌적 사랑보다 더 큰 회복의 사랑을 베푸십니다. 싸메어줌의 사랑은 징벌적 사랑 다음에 2:14절부터 시작됩니다. 주님은 때리고 심판하고 그래서 배신에 대해 복수하는 것으로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때부터 얼마나 불가능한 용서와 사랑을 시작하는지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의 사랑은 완전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패역한 이스라엘을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살펴 보면서, 우리가 받은 사랑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어떻게 그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지 말씀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바알에서 이쉬로


먼저 하나님은 용서하기도 힘든 음란한 여인같은 이스라엘을 향해 다시 사랑으로 가득한 남편이 되겠다고 하십니다. 2:16에서 “그날에 네가 나를 남편(이쉬)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가 있습니다. 여기서 ‘바알’이란 히브리어는 고유명사로 바알 신의 이름이 되고, 보통명사로 ‘남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쉬’라는 말과 ‘바알’이라는 말은 남편을 뜻할때에도 어감에 차이가 있습니다. 전자는 ‘여자의 상대적 의미로 동등성을 함유한 파트너서의 남편’입니다. 우리식으로 옮기면 “여보와 당신”의 관계에서 남편입니다. 하지만, 후자는 ‘여자를 소유하는 자로서 법적 권리를 가진 남편’을 강조하는 의미입니다. 즉 군림하는 왕으로서 소유자의 의미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은 우리와 관계를 회복하시는데, 군림하는 주인의 모습으로서 ‘주종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파트너로서 긴밀한 사랑을 나누는 ‘연인관계’로서 세워가겠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게 지금 가능한 이야기일까요? 솔직히 당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는 간음한 아내와 남편의 이야기입니다. 간음한 아내가 있는 상황, 회복 불능입니다. 받아 들여주기도 힘든 상황인데, 여보 당신의 관계로 간다는 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유대인 남성이 랍비를 찾아와서 “제 아내가 간음을 했습니다. 이혼해야 할까봐요.”하면 당시 랍비들은 단호하게 “안돼”합니다. “그럼... 이런 상태에서도 참고 살라는 말입니까?” 랍비는 대답합니다. “그걸 왜 이혼을 하니? 죽여버려야지.” 이것은 유대인의 법상 이혼이 아니라 죽여야 하는 관계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이 상황은 ‘이혼상황’이 아니라 ‘사형상황’입니다. 당시 유대인의 법상으로도 이건 이혼사유가 아니라 죽여야 될 상황입니다. 


더구나 부부의 신의 관계상, 인간적으로 회복이 ‘절.대. 불.가.능.하.다.”입니다. 이런 상황이면 용서하고 받아줘도, 사랑을 회복한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람 나서 집버리고 떠난 남편... 돌아오면 자식들 봐서 불쌍해서 받아줄 수는 있어도 “여보 사랑해”라고는 못할 것입니다. 다시 회복하더라도, “내가 이를 악물고 다시 받아줬으니 이제부터는 찍소리 하지 말고 내말 들어. 내 말에 토다는 달 토해버린다. 앞으로 내 앞에서 눈 내리깔고 주머니 손 빼고 집구석에 쳐박혀 있어.” 이래도 될 상황입니다. (너무 리얼하게 했나요?)

남편이 바람나서 가정 버리고 떠난 자매님을 저희 부부가 돌본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기도했습니다. 찢어지게 아프고 자존심 상하는 그런 자리에서도 가정을 지키고 기도했었습니다. 결국 다 털어먹고 배신당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자매님이 그러시더군요. “목사님 그렇게 기도하고 기다렸는데... 얼굴을 보니 화가나는데 기다림이 분노로 변하더군요. 옆에 썩은 오물이 있는 것 같고 손이라도 닿으면 뱀이 지나간 것 같습니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요? 그런데 여보 당신하면 사랑을 시작하라면 말이되겠습니까?

그런데, 이처럼 회복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받아주기만도 어려운 상황에서, 사랑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간음한 아내를 받아들인 것만이 아니라, ‘이쉬’ 곧 ‘당신’이 되는 사랑을 회복하겠다는 말입니다. 그저 소유한 남편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주는 이쉬, 남편이 되겠다는 말입니다. 우리와 다시 여보 당신의 관계를 회복하겠다는 말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 바알이 아니라 이쉬임을 찬양합니다. 이렇게 아픈 사랑을 하신 이쉬의 하나님이 여러분의 신랑이십니다. 


이것은 결국 무슨 말인지 아시죠? 내 가슴을 난도질 했던 지난날을 다 잊어버리고 용서하겠다는 말입니다. 가슴에 앙금도 남기지 않고 다 지워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지나간 일들을 기억하지 않고, 이전에 행한 모든 일 생각지 않으리, 돌같은 내 마음 어루만지사, 다시 일으켜 세우신 주를 사랑합니다.” 기억하십시오. 부유하거나 건강하거나 잘 될때에도 주님을 버릴 준비간 된 우리지만, 주님은 우리가 가난하거나 병들거나 간음할때에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고 계십니다. 어찌보면 그건 ‘미친사랑’입니다. 내가 어떤 자리에 있었든지 무슨 일이 있었든지,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는 줄 믿습니다. 


이런 사랑을 하십시오.


내가 한 짓을 하나님이 용서하시기를 원하면서, 남이 한 짓을 용서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누군지 아십니까? 자식죽인 원수입니다. 아들을 벌겨벗겨 놓고 침뱉으며 채찍에 때리며 나무에 달아 죽인 원수입니다. 그것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죽인 원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누군지 아십니까? 나의 사랑을 눈앞에서 배신한 간음한 아내와 같은 원수입니다. 벌거벗어 음란하게 우상에게 몸을 판 고멜입니다. 그런데 자식죽인 원수인 저와 여러분을 아들로 삼고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음란한 고멜인 저와 여러분을 아내로 삼고 이쉬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그 사랑을 해야 합니다. 삶의 한 조각이라도 그분의 사랑을 닮아가야 합니다. 이 말은 “자식죽인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내 사랑을 배신하고 간음한 배우자를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더 기가차고 놀라운 것은 회개하고 돌아온 인간들도 아닙니다. 오늘 2장을 보면, “회개하라. 그러면 사랑하리라” 이런 말도 없습니다. 2-13절을 보면 하나님이 징벌하고 길을 막겠다고 하시면서 회복을 반전이 14절부터 나옵니다. 보시면 “회개하면,” 이런 조건이 없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를 타일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여기서 ‘타일러’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친밀감으로 토닥거릴때 쓰는 ‘침실용어’입니다. 분노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사랑으로 토닥거립니다. 그리고 여기서 ‘위로하고’는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마음에 말한다”는 의미입니다. 토닥거리며 위로하며 회복을 시작하겠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거친 들’로 데려간다 하셨는데, 거친들은 바로 이스라엘의 출애굽의 광야를 말합니다. 즉, 첫사랑의 자리로 데려가서 순수한 첫사랑을 다시 시작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15절 하반절을 봐도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때와 애굽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음란하고 더러운 여성이 아니라, 어린 아이처럼 순수하던 그 때 모습으로 대해주시고, 출애굽의 시작때 뜨거웠던 믿음과 사랑처럼 대해주시겠다는 말입니다. 회개하고 돌아와도 다시 시작할까 말까 할 상황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오히려 첫 사랑으로 돌아가서 너희를 사랑하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사랑에 눈이 멀었습니다. 우리는 눈먼 사랑 하시기 바랍니다. 한 눈 팔아도 용서가 안될 판에 두 눈 다 팔아버린 이스라엘이지만, 주님은 두 눈 질끈 감고 눈물로 흐려진 두 눈으로 눈 먼 사랑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눈 팔고 하나님 사랑하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눈먼 사랑을 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너희도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아픈 사랑을 하기 위해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찢어지게 아픈 사랑하라고 부르셨습니다. 가시 나무새가 가시에 심장을 찔러 마지막 사랑노래를 부르듯 그렇게 사랑하는 일이 우리의 사명인줄 믿습니다.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여러분 우리도 그렇게 사랑하게 되길 소망합니다.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아도, 원수 같은 인생이라 할지라도, 이제 절대 회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완전히 포기했다 할지라도, 다시 첫 사랑이 시작될 것을 소망하는 일, 그것이 우리의 사랑인줄 믿습니다.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그렇다면 이런 첫사랑으로 우리를 품어주시는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소망을 주십니까? 15절을 보십시다.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는 여기서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주신다는 것이 너무 가슴에 와 닿습니다. 아골 골짜기는 ‘사망’의 문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이쉬가 되시는 하나님은 ‘사망의 문 아골 골짜기를 소망의 문’으로 바꾸어주실줄 믿습니다. 

아골 골짜기는 여리고 아래쪽에 있는 곳으로 아간의 죄로 인해 아이성 전투에서 패한 후 그를 죽이고 묻은 곳입니다. ‘고통의 골짜기’인데, 이 의미는 더 아픕니다. 이것이 의를 위한 고난과 고통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말합니다. 즉, 내가 친 사기 때문에 감옥에 갖히는 고통을 말하고, 아버지의 알콜 중독과 아들의 마약 중독으로 인해 온가족이 경험하는 수치와 고통을 말합니다. 아골 골짜기는 하나님께 받는 고난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죄로 인해 나와 가족과 공동체가 겪어야 할 고통의 골짜기를 말합니다. 정말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남들에게 위로 받기도 힘든 고통을 말합니다. 


고난이면 위로라도 받죠. 고난이면 기도해 달라고 부탁이라도 하죠. 고난이면 하나님 원망이라도 하죠. 내 죄로 인해 당하는 수치와 고통이라면 남들이 알까봐 말도 못합니다. 부끄러운 짓 하고 감옥에 갇혀 있는데 기도부탁할 염치도 없고, 말하고 나면 속으로 욕할까봐 눈치만 보이는 그런 일입니다. 그래서 남편자랑 자식자랑 집안자랑 다 포기하고 아무 말도 못하고 썩는 속 참는 것입니다. 지은죄가 있어서 원망도 못하고 흐느낄 수 밖에 없는 삶이 아골 골짜기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약속하십시다. 바로 그런 고통으로 가득한 아골 골짜기도 소망의 문이 될 것이다. 마약에 절은 자식보면서, 알콜에 찌든 남편 보면서, 바람난 아내의 빈자리를 보면서, 남들에게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기도 힘든 아골 골짜기의 고통이 ‘소망의 문’이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오늘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여러분 인생의 아골 골짜기, 사망의 문들은 이제 소망의 골짜기가 될 것입니다. 생명의 골짜기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도 담대히 선포하십시오. “내 인생의 아골 골짜기야 너는 오히려 소망의 문이 될 찌어다.” 그렇게 선포하시게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 장가 가는 날


오늘은 하나님 장가가는 날입니다. 이걸 새장가라고 해야 할까요? 아니면 다시 재혼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데 오늘 여기에서 사용된 결혼의 의미는 오히려 유대인들이 13살때 쯤에 하는 정혼 곧 약혼의 의미입니다. 음란한 아내로 인해 결혼생활이 파탄이 나버렸는데도 불구하고, 받아주는 것을 넘어 어린 시절 순수한 모습으로 우리를 여기시며 다시 약혼때의 사랑부터 시작하겠다는 말입니다. 신부는 이제 음란한 창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름다운 신부의 모습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상태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랑되신 주님은 이런 우리는 13살짜리 소녀처럼 순수하게 여기시겠다는 것입니다. 

고멜같은 우리들이 불안할까봐, 우리를 향한 사랑을 19-20절을 보면 3번에 걸쳐 “장가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장가 들어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 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 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무슨 말일까요? “난 너를 절대 버리지 않는다. 영원히 살자. 할 수 없어서 결혼하는 것 아니다. 진실하게 너와 결혼하고 싶다.” 우리 주님의 고백이 깊게 담겨있습니다. 이게 우리 신랑되신 주님이신 줄 믿습니다. 더러운 죄인인 우리를 가장 아름답고 좋았던 모습으로 여기며 다가오시는 분...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누더기처럼 음란한 몸 뚱아리조차 가릴 수 없는 더러운 죄에 찌든 음란한 창기같은 우리들을 예쁜 교복입고 두 갈래로 머리 땋아 하얀 양말에 까만 구두 신은 여고생같은 첫 사랑의 자리로 이끌어 가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십니다. 


하나님 장가 가는 날... 사랑에 눈먼 날이었습니다. 하나님 장가 가는 날... 바로 십자가에서 신랑되신 예수님이 벌거벗기우고 죽으신 날이었습니다. 사형시켜야 할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당신이 사형 당하신 날입니다. 아골 골짜기, 사망의 문을 소망의 문으로 만들기 위해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신 날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하며 사랑하신 날입니다. 오늘 이 호세아의 예언이 성취된 날은 바로 십자가 사건이 있던 유월절 전날이었습니다. 

그 때 우리는 음란한 신부였습니다. 하지만, 그 은혜와 사랑으로 구속받았다면 신랑되신 주님 다시 오실때에는 “순결한 신부”로 준비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우리 주님 하늘 영광으로 이땅에 다시 오실때, 우리는 다시 마지막 혼인잔치를 시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신랑되시 주님이 하신 아픈사랑처럼, 우리도 아픈사랑을 통해 진실로 신랑을 맞이할 준비가 된 신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만 장가가는 날이 되지 않게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주님처럼 ‘시집 가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 받았으니 사랑해야겠지요. 음란한 여인으로 사랑받은 것에 감사하는 추억 만큼이나, 우리에게 장가드신 주님의 마음을 알고 서는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그런 사랑위해 우리 주님 장가드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도 시집가는 삶 되시길 축복합니다. 


<댓글이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