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설교

나는 성령님을 믿는다 (1) / 에베소서 5장8절: 성령충만한 삶의 이해

양치는선비 2010. 7. 23. 09:36

송병주 목사 (선한청지기교회)

 

1. 들어가는 말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에는 성령론에 대해 극단이 존재한다. 보수적인 교회에서 성령님은 찬밥신세다. 주로 성령님 자중하세요하는 무거운 분위기가 있다. 그래서 성령님이 역사하시면 바로 혼난다. “자중하라 그랬지요?” 거의 허락받고 역사하세요의 분위기다. 그래서 성령님은 교회 벽구석에 가서 벽쳐다보고 손들고 있는 분위기고 자칫하면 당회에서 치리받을 분위기이다. 반대로 성령사역 중심의 교회는 성령님 확뒤집어 주세요하는 up side down 파가 있다. 생각없이 아멘하고 쓰러지는 일에 놀랍다. “오늘 날씨가 춥습니다.”아멘하는 분위기다. 한번은 빈야드 모임에 갔다가 갑자기 옆에 있는 사람이 성령이 임한다고 하자 갑자가 ~하는 바람에 감짝 놀라 나도 모르게 찍찍할뻔했다. 외적 현상에 집중해서 성령 충만의 내적인 변화와 성숙을 간과하는 분위기이다.

이처럼 성령님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성령론은 문제가 많다. 성령님은 하나되게 하시는데 성령론은 교회를 분열시킨다. 이런 극단적인 분위기로 인해 많은 교회들은 성령님에 대해 늘 어정쩡한 태도를 취한다. 그러다 보니 성령님도 성령론도 다루지 않는 것이 미덕이 되어 버렸고, 결과 교회와 목회자들이 다루기 꺼려하는 사각지대에서 곰팡이가 생기고 독버섯이 피어오르는 것을 본다. 이런 상황속에서 우리 교회는 어떤 입장에 서야 할까? 고민끝에 더이상 곰팡이와 독버섯이 주인행세하며 성도들을 혼란으로 몰아가도록 해선 안되겠다고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소간의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성령님을 알고 묵상하는 일을 절대 피해선 안되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갖게 되었고 이번 시리즈를 준비하게 되었다.

항상 우리는 진리를 독점할 수 있다는 교만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부터 시작되는 시리즈에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할 것이라는 점은 필자 역시 편안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교회의 교사로서 공동체적으로 함께 지켜야 할 guide line을 세우고자 한다. 그리고 이것은 공동체적 대화를 통해 계속 update되고 성장해가야 할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이것은 개인의 영역까지 통제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개인의 자유의 영역은 본인의 몫이지만, 공적인 교회의 영역에서 함께 세워가야 할 것으로 여겨주면 감사하겠다. 스테이크 먹으며 개인적으로 와인 먹는 것을 교회가 치리하지 않는다. 하지만, 예배 마치고 다함께 한잔하러 갈 수 는 없는 것이다. 앞으로 나누고자 하는 것은 공동체적 측면에서 어떻게 성령님을 깊게 사랑할 것인지 의미를 정립하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해본다.

주님의 뜨락에는 백향목과 종려나무가 가장 멋지게 심겨져 있다. 백향목은 만년설이 있는 추운땅에서 자라는 나무다. 동시에 종려나무는 뜨거운 사막에서 자라는 나무다. 도무지 같이 공존할 수 없는 나무들이지만, 시편에 나타는 주님의 아름다운 뜨락을 가장 멋지게 장식하는 것은 바로 백향목과 종려나무다. 우리에게 이런 아름다운 균형이 있기를 기대하고 소망해본다.

 

2. 성령으로 충만하라의 의미정리

성령세례라는 표현은 신약성경에 7번 나오는데, 그중 6번은 세례요한의 표현이다. “나는 물로 세례를 받았지만, 그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했는데, 이 말은 나중에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성취되었다. 하지만, 오순절 성령강림 상황에 대한 사도행전의 표현은 성령세례를 받았다는 표현보다는 성령으로 충만하였더라고 전한다. 예언할때에는 성령세례로 표현되었고, 성취될때에는 성령충만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므로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충만과 성령세례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령적 근거를 부족하다.

하지만, 오늘 정말 중요하게 알아야 할 것은 성령세례라는 말이 성령사역의 50%의 의미를 담아낸다면, 성령충만하라는 말이 100%의 더 넓은 의미를 담아낸다는 것이다. 우선적인 것은 성령충만하십시오 할때 충만하라는 말이 두 단어를 통해 두가지 의미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글성경은 그저 충만하라는 한가지 표현만 사용되지만, 원어 헬라어 성경에는 충만하라로 번역되는 말에 2가지 단어가 있다. 그런데 번역은 충만하라로 번역해도 무방하더라도 그 의미와 배경이 다르고 상호 보완적이라는 점이다. 이것을 알지 못한채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한글 표현만 보고 한쪽 방향으로 몰아가는 것은 부적절하다. 그리고 그것을 잘 모르기에 이 의미가 정확히 전달되지 않고 오해를 일으키고 있다.

첫째는 Pimplemi로서 오순절 성령강림처럼 외적으로 나타나는 단기적인 충만이다. 폭발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초자연적인 현상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일시적일 수 있다. 이 경우에는 신앙적인 경륜이 짧고 깊은 신앙이 아니라 할지라도 나타난다. 소위 어제 믿고 오늘 방언이 터져 나오고 신유의 은사를 일으키며 감격스러워 하는 것이 바로 Pimplemi충만하다는 말이다. 말 그대로 다이너마이트처럼 외적으로 터져나오는 능력사역으로서 charge와 같은 의미이다. 사도행전의 오순절 성령강림이나 고넬료 집안에서 나타난 모습을 성령충만이라고 표현한다.

둘째는 Pleroo로서 인격과 삶으로 내적으로 나타나는 지속적인 성령충만이다. 일곱집사를 뽑을때 성령이 충만한 사람, 빌립과 스데반 등을 뽑을때 사용된 표현으로서 이것은 초대교회 교인모다서 방언잘하고 예언잘하며 병을 가장 빠른시간에 많이 고친사람이 누군지 금메달 땋듯 경쟁시켜 얻은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을 통해 삶의 인격과 성숙으로 꽉 찬 상태의 모습을 말한다. 이것은 나무수액이 꽉 찬 것같은 sufficiency와 같은 것으로서 인격적 충만이고, 장기적 충만며, 성령의 열매로 가득한 존재적 충만을 말한다. 이것은 결코 한순간에 이루어질 수 없는 내면의 깊이와 성숙속에 내적으로 채워져 나오는 능력 사역을 말한다.

이처럼 한글로 똑같이 성령 충만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이지만, 의미와 강조점은 서로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문제는 이 차이를 알지 못한채 편향된 해석만을 하다보니 성령론이 큰 불균형을 이루는 문제를 낳았던 것이다. 물론 많은 평신도들이 헬라어도 모르는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느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사실 이 말은 헬라어를 몰라도 한글성경의 문맥을 살펴보면 거의 대부분은 어떤 의미로 쓰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성령사역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 성령세례라는 전매특허와 같은 용어를 강조하며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오늘 이 용어의 차이를 안다면 그 말이 성령사역의 전매특허가 되기에는 부족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성령세례라고 쓰는 표현은 Pimplemi로서 성령충만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성령세례는 오순절 성령강림에 포커스가 맞추어졌고, “성령세례라는 표현과 성령충만Pimplemi는 교차적으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성령세례라는 말이 성령사역을 대표하는 표현처럼 사용되는 것은 엄격이 말하면 너무 좁은 의미이다. 오히려 한글로는 성령충만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 성령사역의 2가지 측면을 다 아우르는 총체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pleroo로서 지속적이고 장기적인 성령의 충만을 말한다. 그래서 필자는 오늘 본문으로 소위 불 받으라는 부흥설교를 들으면 조금 당황이 된다. 그저 혼자는 pleroo 인데 하는 생각때문에 참 어렵다. 하지만, 술취함의 이야기와 대조하는 방법을 선행하고 있어서 Pimplemi로서 의미도 함께 다루기에 좋은 본문이다. 그래서 엡 5:18을 통해 성령충만의 2가지의 의미를 살펴보고 어떻게 균형을 이룰 것인지 나누도록 하겠다.

 

3. 성령님은 외적 변화를 일으킨다.

먼저 같이 나누고 싶은 것은 성령님은 일상과 상식을 뛰어넘는 강력한 외적 역사를 일으키신다는 점이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Pimplemi로서 성령의 역사이다. 오순절 성령의 강림이 있고나서 행 2:13을 보면 사람들의 조롱하는 말을 볼 수 있다.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더라 하였더라성령 강림이후 사람들의 첫번째 반응은 놀라며 당황하는 일이었고, 두번째 반응은 이렇게 조롱하는 모습이었다. 오순절에 가시적으로 강력하게 임한 성령의 역사는 그들의 조롱처럼 술취한 것처럼 보일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술취한 사람과 성령충만한 사람들의 모습은 외적으로 비슷해 보일 수 있다. 오늘 읽은 본문인 엡 5:18 역시 술취함과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는 것을 대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술취한 사람과 성령충만한 사람의 공통점이 무엇이 있을까? “겁이 없어진다. 놀라운 용기에 불탄다. 그리고 말이 많아진다. 노래를 잘 부른다. 기분이 좋다. 잘 운다. 왠만큼 맞아도 아픈줄을 모른다.” 위의 모든 것은 술취해본 경험에서 나온 것이 절대아님을 우선 밝힌다. (이 이야기 들으면서 너무 웃으시는 분들은 조사를 해봐야 한다. ^^) 성령충만함은 절대 감출 수 없는 일이다. “제 속에 성령님이 계시지만, 저는 가만히 있고 싶어요…” 그것은 기적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dunamis라는 능력이란 별명을 가진 성령님의 이름에서 다이너마이트라는 말이 파생된 것처럼 성령님은 우리를 너무 들뜨게 만들어 버린다. 성령의 가장 큰 역할은 바로 transformation, 변혁의 원동력이 된다.

성령의 충만함은 이처럼 우리를 다이너마이트같은 폭발하는 힘을 우리에게 주신다. 왜 그렇게 하실까? 이 때는 우리가 분명히 뚫어야 할 견고한 진과 자신의 장벽을 깨뜨려야 할때에 일어나는 일이다. 유대주의적 사고와 유대주의에 대한 두려움에 갖혀 있는 제자들을 일깨우기 위해 성령님은 이처럼 일상과 상식을 뛰어넘는 폭발적인 사역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성전 미문앞에서서 복음을 선포하고 두려움 없이 세상 앞에 나아가게 하기 위해 자신의 울타리와 선입관과 통념을 넘어설때 그렇게 역사하신 것이다. 그저 우리에게 신비한 능력을 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과 한계를 뛰어 넘어야 할때 Pimplemi의 역사는 필수적이다. 장로교인은 항상 제한된 한계속에서만 신앙생활 하도록 예정되지 않았다. 성령님의 이 역사가 없다면 누가 인생을 선교사로 드리며 세상과 전혀다른 길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결단을 하게 할 것인가?

사도행전에서 성령님이 임하실때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 불의 혀가 갈라지는 것처럼임했다고 하는데, 이 두가지 형상, 바람과 불은 둘이 합쳐질때 불꽃을 일으킨다. , 멈추어 조용히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온 들판을 삼켜 버릴 듯 일어나는 화염이 되는 것이다. 성령님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가스 레인지도 아니며 내 손안에 장악당해 있는 라이터도 아니다. 헬기가 뜨고 수많은 소방대원이 동원되어도 어찌하지 못하는 화염이다.

 

4. 성령님은 우리의 삶의 전반을 변화시킨다.

하지만, 주의할 것은 성령의 충만함이 늘 일상과 상식을 뛰어넘는 것은 아니다. 두번째로 기억해야 할 것은 성령님은 일상과 상식속에서 구별되는 삶을 살수있도록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만약 일상과 상식을 뛰어넘는 성령의 역사만 선호하고 있다면, 일상을 던져준 삶만 추구하게 됨으로 가정을 포기하고 뛰어다니는 악기능에 불과할 것이다.

일상과 상식을 벗어난 신앙생활에 몰입하는 사람들을 보면, 전부는 아니겠지만 많은 경우 성령께서 역사하기 보다는 오히려 깊은 숨겨진 내면의 문제가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내 속에 도피하고 싶은 일상에 완전히 지쳐 있거나 내면의 상처와 현실 불만족이 가득할때에, 초월절 영성만을 성령의 역사로 여기고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게 일어난다.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의 경향처럼, 일상의 무게와 삶의 고통에 현실을 피하고 싶은 경우 일상과 상식을 뛰어넘는 성령의 역사만 몰입한다. 이럴 경우에는 오히려 상담이 더 절실하게 필요한 단계이지 불받을 상황이 아닌 것이다. 이럴수록 성령중독 현상이 나타난다.

다이너마이트에 만족하지 못하고, 105mm 박격포가 필요해지고, 방사포가 필요해지며, 나중에는 핵폭탄 중성자탄이 필요하게 된다. 더 강하고 자극적이며 폭발적인 것을 원하게 된다. 한 교회에서 성령집회 시작하면서 포스터를 붙였는데, 처음에 성령의 다이너마이트를 경험하라고 붙었는데, 1년 쯤 지나서 포스터가 붙은 것을 보니 성령의 핵폭탄이 터진다.”고 된 것을 보았다. 그리고 좀더 자극적인 형태의 집회는 이제 성령의 검을 휘두른다는 사역자부터 성도들을 눕혀두고 밟고 지나가는 형태등 더욱 자극적인 중독현상을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결국 우리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성령의 충만함은 우리에게 술취함과 같은 현상을 일으키면서 동시에 우리의 삶의 전반을 변화시키는 능력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18절의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하신 오늘의 말씀은 술취함고 같은 성령충만함의 삶이 앞으로 어떤 열매를 맺어야 하는지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19절은 은혜 충만한 예배의 회복과, 20절은 지극히 평범한 범사의 삶에 감사의 회복, 21절은 성경적인 대인관계의 회복, 그리고 22-33절까지는 남편과 아내의 온전한 부부관계의 회복이 성령충만한 삶의 후속 열매로 따라올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6장으로 이어져서 부모와 자식의 윤리적 관계, 주인과 종의 사회적 관계로 이어지고, 이 모든 것이 영적전쟁을 위한 전신갑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성령충만한 사람이 남편을 하나님처럼 사랑하고, 성령충만한 사람이 아내를 동등하게 여기는 것이다. 성령충만한 사람이 부모에게 순종하고, 성령충만한 사람이 자녀를 노엽게하지 않는 것이다. 성령충만한 사람이 종들에게 공갈을 그치고 공평히 대하며, 성령충만한 사람이 눈가림으로 일하지 않고 주님 섬기듯이 상전을 섬기는 것이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명령과 영적전쟁을 위해 전신갑주를 취하라는 양쪽의 버거 사이에 분명히 자리를 잡고 있는 Patty는 성령충만한 삶처럼 보이기 보다는 오히려 지극히 윤리적 선행처럼 보이는 삶을 앙꼬로 여기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단순히 윤리적 삶을 산다고 성령충만이라고 단순화해서는 절대 안되겠지만, 일상의 구별된 삶을 포기한채 술취한 듯 산다고 해서 다 성령충만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5. 성령충만을 받아야 할 이유 강한 세상의 도전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성령충만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성령충만함을 받는 삶을 option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Why don’t you도 아니고 Would you로 시작하지 않는다. 모두가 받아야 할 것으로 2인칭 절대 명령법을 사용하고 있다. 반드시 성령충만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명령한다고 충만해지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강하게 명령으로 요청하셨을까? 그것은 바로 마지막때의 영적싸움에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이다. 우리 힘으로 안되는 것을 알기에 성령님을 보내셨고, 충만하지 않으면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인 것이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에게 철저하게 완전군장하라는 말과 같은 말이 성령 충만하라는 명령이다.

성령님은 마지막때를 위해 오셨다. 계시의 완성과 종결로서 마지막때를 위해 준비되신 하나님이시다. 마지막때가 될 수록 사단의 공격은 더욱 치열해지고 강력해진다. 영적인 원리는 하나님의 나라가 강해지고 사단의 권세가 약해지는 반비례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의 확대와 사단의 저항은 동일하게 강하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헷갈리고 힘드는 것이다. 이처럼 처절하고 힘든 싸움이 있기에 주님은 우리에게 크 영적전쟁을 수행할 수 있도록 종합적인 힘과 능력을 주고 있는 것이다. 내면적인 충만과 외적인 충만을 통해 전신갑주를 입게하여 승리로 인도하는 것이다. 벧전 5:18은 우리에게 더욱 깨어 근신하라고 한다. 그래서 마지막때를 위해 우리에게 감당할만한 영적 아드레날린 주사를 주신 것이다.


6. 맺으며

PimplemiPleroo 를 함께 이루어 주님의 뜨락을 장식하는 백향목과 종려나무처럼 하나님 나라의 자랑이 되는 교회와 성도에 대한 기대감을 가져본다. 극단적인 치우침으로 인해 십자가와 은사가 싸우고, 예수님과 성령님을 갈등하게 해선 안된다. 서로를 향한 배려가 넘치고 함께 절제와 배려라는 균형잡힌 덕목을 통해 서로가 함께하는 법을 배우는 삶이 필요하다. 목이 터져라 방언기도하는 사람도 절제가 필요하고, 방언소리 조금 난다고 방언은 방에가서 하라고 노랑쪽지 주고가는 모습도 극복되어야 한다. 같이 살 수 없는 두 나무, 백향목과 종려나무가 주님의 정원을 가장 아름답게 하듯이 우리에게 그런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성령님은 결코 신앙생활의 Option이 아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의 소품이 아니라 나의 영적 생존을 위한 하나님의 생존통로이다. 성령님은 마지막때를 위해 오셨다. 성령충만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사명과 같다. 명령을 통한 긴박성은 결국 간절히 사모하라는 도전이 숨어있다. 간절한 사모함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