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설교

2012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십자가만 자랑하라"

양치는선비 2012. 4. 7. 02:25

2012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특새)


갈 6장14절

십자가만 자랑하라.

송병주 목사 (LA선한청지기교회)



  • 들어가는 말


고난주간을 통해 우리는 계속해서 소품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담긴 의미, 그것이 우리에게 주시는 의미가 무엇인지 나누고자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만 자랑하는 삶이 무엇인지 나누고자 합니다. 


  • 십자가는 사형도구이다.


사실상 십자가는 분명코 사형도구입니다. 가장 참혹한 사형도구였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황제들은 “교양있는 로마인이라면 십자가라는 말을 입에 담는 일도 혐오스럽게 여겨야 할 것이다” 할 정도로 끔찍하게 여겼습니다. 만약 로마시대에 십자가 목걸이를 하고 다녔으면, 요즘 젊은애들이 귀신 문양과 해골문양이 새겨진 T-shirts 입고 다니는 것이나, 속옷 보이게 바지 늘어지게 해서 다는 것 보다 더 혐오스럽게 여길 것입니다. 만약 로마시대때 십자가를 들고 나가는 것은 할로윈 퍼레이드에 귀신가면 쓴 것과 동일하게 여길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가장 끔찍한 사형도구인 십자가를 목에 걸고 있다면, 우리가 지금 목에 단두대 모양 목걸이나, 교수형 시키는 밧줄을 목도리고 걸고 다닌 것과 같습니다. 또 우리가 기도할 때 십자가 문양을 그리며 기도한다면, 이것은 기도할때 단두대 칼날 흉내처럼 목을 긋는 모습을 하거나, 교수형 올가미 당기는 모습을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끔찍한 도구를 바울은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나니...”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자랑할 것은 단 한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성공한 기독교인 사업가의 재단을 자랑하지 맙시다. 훌륭한 그리스도인 받은 노벨상을 자랑하지 맙시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받은 아카데미상을 자랑하지 맙시다.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대통령이 된 것을 자랑하지 맙시다.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병고침의 능력을 자랑하지 맙시다. 예수 그리스도의 멋진 설교를 자랑하지 맙시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오직 그분의 십자가만 자랑해야 합니다. 


  • 참된 신앙: 십자가만 자랑하는 삶!


현실을 끌어안는다는 것은 현실에 “순응”하는 것을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현실을 끌어 안는다는 것은 현실에 “직면”하는 것입니다. 만만치 않은 십자가와 같은 현실을 향해 직면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는 나약한자들이 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향해 채찍질 하는 로마 군인들이 더 강한 것이 아닙니다. 착한 사람들이 순종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강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을 능력을 논하지 말고 십자가를 감당할 능력을 구할때,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의 능력있는 삶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신앙은 고통을 피할 “부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끌어안고 이길 “십자가”를 얻는 길입니다. 


우리교회는 20주년을 보내었습니다. 우리의 잘한 것을 자랑하기 전에 “십자가”만 자랑하게 되길 소망합니다. 십자가만 바라보고, 십자가만 붙들고, 십자가를 지었노라 말하는 믿음의 여정속에 참된 기쁨과 능력이 있는줄 믿습니다. 시대에 뒤쳐지는 것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시대를 살리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시대를 앞서가도 시대를 살리지 못한다면 무의미합니다. 지금 우리는 시대에 뒤쳐질 것인가 선도할 것인가를 논할 것이 아니라 시대를 살릴 것인가 못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 길은 바로 십자가로 끌어안는 담대한 결단속에 있는줄 믿습니다. 십자가만 자랑하는 교회, 그것이 우리의 참된 신앙일 것입니다.


  • 고난의 십자가, 피묻은 복음만


사실 현실이 암울할때 우리는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이 항상 가득합니다. 하지만, 현실을 이기는 것과 현실을 피하는 것은 분명코 다릅니다. 현실을 피한 것은 여전히 현실에 갇혀있는 또다른 모습일 뿐입니다. 현실은 부정할 수록 강해집니다. 하지만, 현실은 긍정함으로 약해집니다.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현실을 끌어안을때 현실을 이긴다”는 것입니다. 두눈을 부릅뜨고 바로 보는 사람이 두 눈을 질끈감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눈물을 아는 사람이 웃을 줄 알며, 절망을 아는 사람이 희망을 품습니다. 이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십자가 신앙”입니다. 


참된 신앙은 고통을 피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고통을 이기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고통을 피할 길을 얻는 “부적”이 아니라 고통을 짊어지는 “십자가”를 얻는 길입니다. 


그렇다고하여 신앙은 고통을 즐기며 고통을 숭배하는 자학적 어떤 것도 아닙니다. 기복주의를 거부할 뿐이지 축복을 축복으로 말하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어설픈 복채로 쉽게 살 것 같은 기복을 구하는 무당종교 따위가 되는 일을 피하고 싶을 뿐입니다. 부정타서 벌받고, 믿음 없어 병걸렸다는 식으로 “고통받는 자들을 두번 죽이는 승자만을 위한 종교가 되는 일을 피해야한다”는 마음 뿐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교회가 십자가를 부끄러워하고 신앙인이 십자가를 외면하는 현실입니다. 그래서 어느틈에 십자가 없는 기독교를 만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다시 십자가를 말해야 할 때가 되었음을 발견합니다.


우리 목회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이 강단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오직 십자가를 붙들고 피묻은 복음을 목이 터져라 선포하는 곳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주십시오. 재능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만 자랑하는 목회자와 사역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 말만 나오면 눈물이 울컥하고, 격하게 끌어오르는 기도와 찬송이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번영이 아니라 고난을 사모하며, 고지가 아니라 미답지를 찾는 복음의 사람들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우리는 고난주간을 맞을때마다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고난주간에 예수님의 장례식을 치루었고, 정왕호 선교사님의 장례식을 치루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한가지 더 질문해야 합니다. “나의 옛사람의 장례식은 치루었는가?” 아직 문제가 있다면 우리가 안 죽은 것입니다. 안 죽었다면 십자가는 자랑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십자가도 자랑한다”고 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말했습니다. 주님이 죽임 당하신 오늘, 십자가 신앙으로 참된 믿음을 갖고 서게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