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설교

2011 고난주간 특별새벽기도회 / 고난은 나약함의 결과가 아닙니다.

양치는선비 2011. 4. 21. 02:32

본문 / 53:1-7
제목 / 고난은 나약함의 결과가 아닙니다. 


 

다른 메시야를 만납시다.

유대인들은 이사야 53장을 곤혹스러워합니다. 한때 이스라엘에 전도하신 분들이 이사야 53장을 읽으라는 문구로 전도를 할 만큼 유대인들에게는 공격적인 본문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하면 의도가 불순하다하여 매우 불쾌해합니다. 그러므로 때로는 오히려 사용하는 것을 주의해야 할 정도입니다. 이 본문에는 메시야의 모습이 참으로 다르게 나타납니다. 유대인들이나 우리들이나 할 것없이 위대한 메시야, 힘있는 권력적인 메시야, 정복적이고 공격적인 능력있는 메시야를 기대합니다. 이점에서 오히려 힘의 기독교를 지향하는 분들이나 유대인들안에 공감대가 있음을 봅니다.

그런 기대감으로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는 사 53장의 예수님은 참 낯설게 느껴집니다. 남을 살려주는 것은 고사하고 자기 몸조차 간수하지 못하는 그런 나약한 존재로 묘사됩니다. 권력과 힘을 쓰러뜨리기 보다는 찔리고 상하고 버림받는 나약한 힘없는 하층민처럼 보입니다. 자기가 사랑한 백성에게까지 외면 당하는 그런 존재가 메시야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저는 나약한 메시야로 보이지 않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나약한 존재는 절대 희생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만약 당신이 희생할 수 없다면, 그것이야 말로 당신이 나약한 존재라는 반증입니다.

희생을 나약함과 강함사이에서 나오는 말이 아닙니다. 희생은 진정한 사랑의 힘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나약함으로 보인다면 the power of love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고난을 통해 나약한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의 힘을 봅니다. 힘의 논리가 움직이는 세상속에서 우리는 다시 사랑의 논리가 움직이는 세상을 꿈꿉니다. 예수님이 고난과 희생이 왜 하나님의 능력인지, 우리의 위로인지 나누고자 합니다.

 

고난은 공감입니다.

먼저 나누고 싶은 것은 고난은 공감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첫번째로 하신 것은 고통과 슬픔을 향한 공감입니다. 4절은 질고를 지고, 슬픔을 당하였다고 합니다. 질병으로 인한 고통, 그리고 인생이면 피할 수 없는 슬픔을 다 짊어 지셨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신이 아닌 인간이면 피할 수 없는 유한함에 대한 하나님의 처절한 공감입니다.

질고는 질병과 고통입니다. 질병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 육체적 고통을 넘어 경제적인 한계로 인한 마음의 고통,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을 지켜봐야 하는 참을 수 없는 고통,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 두고 가야 하는 사람의 마음의 고통을 다 포함하는 일입니다. 이처럼 질병은 고통을 확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질병에 관심이 많습니다. 질병을 고치는 방법에 대해 관심을 갖고 온갖 치료법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질병보다 그 질병을 인한 고통을 잘 공감하지 않습니다. 환자는 병에 대해 알아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질병으로 인해 마음속에 가족들을 두고 떠나는 고통에 대해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환자의 가족들은 질병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을 지켜보는 고통이 더 큽니다. 그럴때 그 고통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날때 큰 위로가 됩니다.

때로 우리는 그 고통을 함께 하고 아파하기 보다는 어설픈 훈수와 충고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맙니다. 사람들의 위로를 들으면 위로가 될 말은 10마디 중에 한마디도 없을때가 많습니다. 말로 위로되지 않을 것을 알기에 말에 상처받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인내로 이겨가는 것이지 질고를 대신지는 분을 만나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셨습니다. 병걸린 사람들의 질병때문에 운 것이 아니라, 그 질병으로 인해 그들이 겪고 있는 눈물과 고통으로 인해 우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질병을 짊어지신 분이 아니라 그 질병으로 인해 마음에 남은 고통의 찌꺼기까지 다 짊어지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면 마음에 위로가 임합니다. 말하지 않아도 내 눈물과 고통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질고가 폭풍같은데 반면에 슬픔은 안개같습니다. 슬픔은 배신과 실망을 통해 밀려옵니다.  슬픔은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않으면서도 슬픔은 누구보다 일찍 나를 깨웁니다. 슬픔은 항상 과로를 합니다. 그렇게 과로를 하면서도 지겹게 끝까지 놓지 않습니다. 그래서 슬픔은 오랫동안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고 지치게 합니다. 오늘 본문의 3절을 보니 이 슬픔이 무엇인지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슬픔을 아실까요? 3절은 2번에 걸쳐서 사람들에게 당하는 멸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슬픔은 당신의 피조물들에게 당하는 멸시와 모욕이었습니다. 어쩌면 고통보다 더 큰 아픔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당한 멸시로 인한 슬픔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당할 수 있는 멸시, 가장 큰 슬픔이 무엇일까요? 연인에게 당하는 배신감도 탈영을 하고 싶게 만들만큼 그 슬픔일것입니다. 하지만, 아마도 아들에게 침 뱉음과 조롱을 당하고 주먹으로 맞으며 벌거 벗기우도록 옷이 찢어지게 되어 사람들앞에 내동댕이 쳐진다면, 그가 더욱 아버지라면 살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고통을 안다면, 창조주가 피조물에게 당한 멸시와 모욕이 어떤 심정일런지 생각해봅니다. 이사야는 이것을 슬픔으로 묘사합니다. 멸시와 외면과 버림받음으로 인한 슬픔은 가장 피가 섞인 눈물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슬픔을 아시기에 오늘도 살고 싶지 않을 슬픔을 가진 우리의 눈물을 주님은 짊어지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더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슬픔의 자리까지 이르셨고, 그래서 살 소망을 잃어버린 백성들의 슬픔을 누구보다 아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고난은 공감이었습니다. 어쩌면 신이라면 알 수 없고 겪을 필요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친히 끌어안으셨습니다. 고난은 안개같은 슬픔이나 폭풍같은 질고를 향한 하나님의 공감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저는 처음에는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면 항상 죄의식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고난을 묵상하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그저 너무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우리가 채운다면, 우리에게도 질고와 슬픔을 향한 공감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고난은 어떤 위대한 일과 사명을 감당하다가 당하는 어려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참된 고난은 공감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저는 목회자들을 세울때 나름대로 고민과 기준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감이라고 믿습니다. 앉아서 책읽고 세미나 참여하여 얻은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눈물과 고통의 열매를 아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역하고 싶습니다. 부흥회 강사를 모셔도 화려한 언변과 지식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에 절망한 눈물을 가진 사람들을 모시고 싶어합니다.

아름다운 성도, 교회의 지도자도 동일합니다. 아픔을 아는 사람들, 눈물을 아는 사람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눈물과 질고를 대신 짊어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질고와 아픔을 함께 질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꼭 경험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경험했어도 절대 아픔을 지려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끌어안을 마음, 이것이 고난의 의미를 아는 삶이라 믿습니다.   


 

고난은 대신죽음입니다.

이 공감은 결국 대신죽음으로 이어집니다. 5절에서 나오는 찔림은 뚫렸다는 뜻입니다. 구멍이 난다는 말을 의미합니다. 그냥 찔렸다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뚫려 버린다는 뜻입니다.  상했다는 말은 스크래치가 나고 파손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완전히 박살나고 조각나 버렸다는 말입니다. 채찍에 맞았다고 했는데, 당시 채찍은 가죽끈 주변에 납과 낚시바늘과 쇠조각을 붙여서 살점이 떨어지게 만든 것입니다. 당시 전승에 의하면 십자가형을 당한 사람의 경우 이동 경로중에 약 120대 정도를 맞게된다고 합니다.

Passion of Christ에서 예수님이 그렇게 피흘리게 되는 것도 사실상의 표현에 비한다면 부족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장면만으로도 그렇게 처절했는데, 철저한 고증으로 영화를 만들려고 했지만, 오히려 십자가는 고증대로 하기가 힘들만큰 처절했다고 합니다. 가시면류관은 피부를 찢는 것이 아니라 두개골을 긁는 것이었고, 돌로된 길을 걸어가며 넘어질때마다 무릎은 뼈가 드러나도록 깨어졌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처절했습니다. 뭐하려구요? 무엇을 얻기 위해서요? 바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입니다.

한 학교의 얼짱이라 불리운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공부도 잘하고 얼굴도 너무 예쁘고 매너도 좋아서 모두가 완벽이라고 말하는 소녀였습니다. 하지만, 그 아이에게는 남모르는 핸디캡이 있었는데, 얼굴이 얼그러진 어머니였습니다. 그렇게 예쁜 여자아이게 그렇게 추한 엄마가 있다는 것이 늘 부끄러움이었고, 그래서 그 소녀는 엄마가 어떤 일이 있어도 학교에 오지 못하게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소녀는 도시락을 들고 오지 않았고, 헌신적인 엄마는 많은 고민끝에 스스로 도시락을 들고 학교를 향해 나섰습니다. 몰래 조용히 교무실에 맡겨두고 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하필이면 학교 전체 모임이 운동장에 있었고, 학교를 들어가던 길에 쏟아져 나오는 학생사이에서 그 엄마는 노출되고 말았습니다. 수많은 아이들이 얼굴을 찡그리고 피하는 상황이 되었고, 그 소녀도 엄마를 외면하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학교가 마치고 집에 돌아온 소녀는 엄마를 외면했다는 미안함보다 학교를 찾아온 엄마를 향해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눈물만 흘렸지요. 이 소리를 듣다못한 외할머니가 들어와서 그 소녀를 향해 눈물로 소리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말하지 않고 참았지만, 이제 이 할미가 말해야겠다. 넌 그러면 안되. 네가 네 어미에게 이러면 안되. 어린 갓난아기 시절 네 집에 불이났었다. 너를 살리려 불난 집에 뛰어든 네 애비도 나오지 못하고보다 못한 네 어미가 타들어가는 집을 보며 수건에 물 적셔서 사람들이 말리는 걸 뿌리치고 집에 또 뛰어들었지. 너를 발견하고는 젖은 수건으로 나를 감싸고 달려 나오다가 얼굴에 그만 화상을 입고 말았어. 그렇게 살게된게 넌데 네가 네 어미보고 이러면 안되는거야…”

그렇습니다. 고난은 바로 사랑으로 인한 대속적 죽음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랑없는 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이 희생은 나약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나약한 자들이 채찍을 120대를 맞으며, 조롱을 당하며, 침 뱉임을 당하며, 옆구리에 창을 찔리며, 가시 면류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박힐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힘이 없다면, 이 일은 결코 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군사적인 힘과 정치적인 힘은 보이지 않을지 몰라도, 십자가에는 채찍과 못질이 이길 수 없는 사랑의 힘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우리는 평화와 나음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공감과 대신죽음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향해 5절 말씀처럼 평화와 나음을 얻게 하셨습니다. 고난은 고난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고난은 반드시 열매를 맺습니다. 그 열매는 주님이 누리시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얻을 열매를 위해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누릴 열매를 위해 주님이 고난당하신 것입니다. 엄청난 대가를 치루고 주신 것이지만, 주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값없이 주는 선물이니라.” 당신이 치루신 희생, 우리더러 알아달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거저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선포할 수 있습니다. 용서받지 못한 자도 그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숨겨진 죄로 인한 피할 수 없는 죄책감, 질병으로 인한 고통, 멸시로 인한 절망과 좌절,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슬픔의 깊은 늪속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모든 상한 감정으로부터 우리는 치유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속에 남아 있는 깊은 죄의식, 용서받지 못할 자라는 두려움, 살아가면서 사람과 자신에게 실망하고 상처받은 모든 상한 것들이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나음을 입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을 자기암시와 강화와 최면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고난, 그것이 우리를 살게하고 우리를 살립니다. 고난의 십자가를 믿으십시오. 그것이 여러분을 살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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