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설교

예레미야 18장 13-23절 / 문자언어가 아닌 가슴언어 읽기

양치는선비 2010. 5. 18. 15:02

생명의삶 QT노트 

 

선지자의 아픔

예레미야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한다. 왜 눈물의 선지자일까? 사랑하는 백성들을 향해 멸망을 선언해야 할 선지자로서 그들이 당하게 될 고통과 심판이 안타까워서 흘리는 깊은 고뇌의 눈물이 주된 이유였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선지자로서 이런 거룩한 눈물만 있었을까? 그런 거룩한 눈물도 있었겠지만, 선지자 예레미야이기 이전에 인간 예레미야로서 당한 멸시와 거절감과 상처로 인해 참 많이 아픈 눈물을 흘려야 했을 것이다. 아무리 사명을 받고 걸어가는 길이라지만, 왕따 당하며 악의에 찬 공격을 받는 일은 스스로 고스란히 감당해야 할 자신의 몫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 아니라 예레미야 자신의 몫이었다. 그래서 참 힘들었을 것이다.

18절을 보면, 그가 어떤 상처를 받고 있는지 볼 수 있다. 완전한 무시!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고 있다. 19절을 보면 나오듯이 내가 주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이키게 하려고 주의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하여 선한 말씀 한 것을 기억하옵소서그들을 살리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이처럼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니 얼마나 힘들었는지… 20절부터 독설이 터져나오고 예레미야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선지자의 길을 걷는 일은 참 아픈일이다. 선지자가 된다고 해서 한순간 강심장이 되고 상처받지 않을 철갑옷을 두르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예레미야의 눈물속에는 거룩한 선지자의 눈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아픔과 고통이 배여있는 쓴 눈물도 깊게 배여있다. 그러므로 부름받아 나설때 기억해야 할 것은 피할 수 없는 고난이 있다는 것이다. 섬기는 자리에 설때마다 발견하는 것은 억측같은 오해를 받기도 하고, 피할 수 없는 뒷담화의 대상이 되기도 하며, 각종 구설수에 시달려야 한다. 그래도 가야할 길이라면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안수집사 선거를 앞두고 같이 나누고 싶은 것은 리더로 세워지는 준비는 바로 예레미야의 눈물을 흘릴 준비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밤에 잠이 오지 않을때가 있다. 어처구니 없는 억지, 의도적인 오해, 이용당하고 책임까지 뒤집어 쓸때면 밤 새도록 그날 주고 받은 대화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북처럼 두들겨 된다. 부들부들 떨릴만큼 힘들다는 성도들을 만난다. 잘 믿었고, 순종했기에 이런 일을 당할때면 더욱 힘들다. 말씀대로 선하게 살았는데그 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들로 인해 밤잠 못자고 고민하고 힘들 수 있다. 나는 희생하며 도왔는데, 정작 내가 필요할때 자기 이익 챙기는 모습나는 내일처럼 돌보고 도왔는데, 그 사람은 남일처럼 여기며 외면할때우리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느낀다. 잘 믿었지만, 하나님을 순종하여 간 길이지만, 이렇게 살 떨릴 만큼 잠 못이루는 고통이 있을 수 있다.

 

아플땐 아파하라.

이럴때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필자는 도인처럼 굴려하지 말고, 아플때는 아파하라고 말씀 드리고 싶다. 성경에는 우리로 당황케 하는 표현들이 많다. 시편에는 아름다운 찬송시만큼이나 분노와 격정이 담긴 탄원시들이 자리잡고 있다. 섬뜩할 것 같은 표현들이다. 기독교 신앙은 정제된 교과서적 언어와 서사적 언어로 신을 감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위장되지 않은 자신의 연약함을 그대로 표출하는 소통의 종교다. 20-23절 사이의 예레미야의 섬뜩한 표현은 눈으로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눈으로 읽을때 섬뜩한 표현이 보이지만, 가슴으로 읽을때 찢어진 상처받은 선지자의 눈물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예레미야를 통해 발견하는 중요한 원리는 아파하되 그의 탄원이 사람을 향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나의 눈물과 찢어지는 마음을 토로하는 것이 성숙함이다. 사람에게 탄원하면 순간적인 기분풀이는 되지만, 지속적인 엉킨 실타래를 안고 있는 것과 같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탄원하면 당장은 별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영원한 회복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다. 아무리 아파도 사람에게 쏟지 말고, 하나님 앞에 쏟아야 한다. 사람앞에 쏟아놓으면 부메랑이 되어 다시 뒤통수를 치지만, 하나님 앞에 쏟아놓으면 은혜의 샘물이 되어 마음속에 솓아 오르게 된다. 오늘 이 새벽하나님 앞에 탄원하는 시간이 되길 소원한다.

 

맺으며 문자언어가 아닌 가슴언어 읽기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선지자가 이런 멸망을 구하는 기도를 할 수 있느냐고 말을 한다. 하지만, 이것은 문자언어를 읽었을 뿐이지 가슴언어를 읽지 못했다고 말하고 싶다. 유대가 징벌받은 것은 20-23절 사이에 나오는 예레미야의 심판을 청원하는 기도 때문일까? 아니면 13-17절사이에 나오는 이방보다 더한 유대의 종교적 타락 때문일까?

징벌 시키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이나, 징벌시켜 달라는 예레미야의 기도속에 분노만 보인다면 문자언어를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그 서슬이 시퍼런 표현조차도 가슴언어로 읽는다면 이 속에는 눈물과 사랑의 절규가 가득함을 볼 수 있다. 오늘 필자는 선지자의 아픔속에 분노속에 사랑을 본다. 부들부들 떠는 것처럼 여겨지는 분노속에, 부들부들 떨며 구하는 구원의 염원을 본다. 걱정하지 말라.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아파서 지르는 소리를 문자언어로 들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아파서 지르는 소리를 가슴언어로 들으신다.이 인간은 죽지도 않나?” 한다고 해서 그 인간 데려가시지 않는다. 가슴언어를 들으시는 하나님그래서 감사의 이유가 되고, 그래서 우리도 주님의 가슴언어를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