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설교

신년특별새벽기도회 2 / 단 1:10-21 / 지혜로운 결단이 주는 믿음의 열매

양치는선비 2011. 1. 6. 04:39
주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 (두번째 이야기)
제목: 지혜로운 결단이 주는 믿음의 열매
본문:  1:10-21

 

들어가는 말

지혜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유리하다 교만하지 않고 불리하다 비굴하지 않는 사람이다. 눈처럼 냉정하면서 불처럼 뜨거운 사람이다. 태산처럼 자부심을 갖되 누운 풀처럼 자신을 낮출 수 있는 사람이다. 사슴처럼 두려워 할줄 알며 호랑이처럼 사나울 수 있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다. 믿음의 길은 동시에 지혜로운 길이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극단이 있다. 지혜를 추구하면 믿음이 약하고, 믿음을 추구하면 지혜가 약하다.” 하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을 가진 사람은 강한 결단만큼이나 깊은 지헤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오늘 다니엘과 세 친구의 모습을 통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강한 결단을 지혜롭게 실현해 가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왕의 진미로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할 정도로 순결을 추구하면서도 지혜로운 모습을 발견한다. 그래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을 일구어 가는 하나님의 사람을 어떻게 채우시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생각이 많으면 결단이 약하고, 결단이 분명하면 생각이 부족하다.”는 극단을 넘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꿈을 향해 지혜와 결단이 건강한 균형을 이루는 성도들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하고 싶다.

 

죽기를 각오하되 죽으려고 환장하지 말라.

 

다니엘과 세친구는 믿음의 승부수를 던지되 그는 지혜로웠다. 박수와 무당이 되기 위한 갈대아 학문을 배우고, 왕의 진미를 먹어야 하며, 창씨개명을 하는 3가지 상황중에 공부를 거부하거나 이름 바꾸기는 거부하지 않았다. 전부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가장 상징적인 믿음의 결과와 승리를 가시화 시킬 수 있는 것으로 음식 문제만을 거부한 것이다. 다른 두가지를 거부하면 바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일이다. 하지만, 음식문제는 직접 관장하는 왕의 부하들과 대화가 가능한 영역이었다.

그리고 음식 문제로 대화를 시작할때, 환관장은 왕이 이 음식을 먹으라고 지정해준 이유를 모르고 그저 건강상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왕은 부정한 음식, 우상숭배된 음식을 먹임으로서 유대 소년들을 영적으로 육적으로 타락시켜 죄의식을 심어주는 종교적 공격으로 시도했다. 이를 알았기에 다니엘도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결단한 것이다. 하지만, 그 환관장은 이것을 종교적 문제로 보지 못하고, 그저 음식으로만 좋은 음식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빈틈을 보인 것이다. 다니엘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Well Being 이야기처럼 풀어가며 자신의 종교적 순결성을 지키는 지혜를 보인 것이다.  

강력한 믿음은 단순 무식 과격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죽기를 각오했지만, 죽으려고 환장한 것은 아니었다. 기억할 것은 무분별한 모험주의가 결코 강한 믿음은 아니다. 더 열악한 중에 왕이 줄 수 있는 것보다 큰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보여준 것이다. 장렬하게 죽어버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이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뜻을 정하는 이유는 나의 믿음의 과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선포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면 우리는 순교의 길을 가야 하지만,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은 오히려 순교자적 삶을 더 기대하고 계신다.

한 마을에 둑이 터졌다. 사이렌 소리가 울리가 주님들은 모두 evacuation하라는 광고가 나왔다. 하지만, 그분은 너무나 믿음이 좋은 신앙인이기에 주님이 구해주실 것으로 믿고 기다렸다. 조금 있다가 물이 무릎까지 차자 경찰이 문을 두드리며 마침 알았기에 다행이지 빨리 대피하라. 곧 물에 잠길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구해주실 것이니 염려말고 다른 사람을 구하라고 말했다. 결국 지붕에 올라갔는데, 보트가 지나가면서 마지막 배이니 빨리 타라고 외쳤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이 구해 주실 것이니 다른 사람을 구하라고 했다. 굴뚝 위에까지 올라갔을때 마침 헬리곱터가 나타났다. “지금 이 줄을 잡지 않으면 죽는다. 빨리 잡으라고 했다. 그때 그는 큰 소리로 외쳤다. “하나님이 나를 살려 줄 것이니 염려말고 다른 사람을 구출하라.” 그리고 결국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당연히 물에 빠져 죽었다. 하나님 앞에 가서 그가 불평을 했다. “왜 하나님, 그렇게 기다렸는데 저를 구해주시지 않았습니까?” 가만히 계시던 하나님이 갑자기 그의 뒤통수를 세게 때리면서 말씀하셨다. “안 도와 주다니 몇번이나 살리려 했는데 말이야알람 울려주고, 경찰 보내고, 보트 보내고, 헬기까지 보냈는데 네가 안들었잖아

때로는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결단이 이렇게 무모하고 무의미한 것은 아닌지 돌아보어야 한다. 지혜없는 무모함이 위대한 믿음일 수 만은 없을 것이다.

 

주변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자신을 돕게 하는 지혜


먼저 발견하는 것은 다니엘이 강한 믿음을 갖고 이씨만, 그것을 검증단계를 거침으로 환관장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지혜롭게 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의 결단을 실현해 가는데 있어서 불도저처럼 밀어 부치기 식이 아니라, 불신자인 환관장이 자신을 도울 수 있도록 검증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0절에서 행여나 자신에게 해가 미칠까 두려워하는 환관장에게 12절을 보면 10일간의 테스트를 하자고 부탁하며 그 결과에 따라 처분을 맡기겠다고 하는 지혜를 발하고 있다. 자신의 믿음을 이루어 감에 있어서도 주도하기 보다 위임하고, 절차와 과정을 적절하게 밟아가는 모습이다. 그렇다. 확고한 믿음은 단순한 밀어 부치기식의 건너뛰기가 아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지혜속에 가득한 상대를 향한 배려이다.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 지혜롭게 배려가운데 펼쳐지는 모습이다. 다니엘은 자신의 포기할 수 없는 꿈을 향해 달려가기 위해 분명한 결단을 하지만, 혼자 무소의 뿔처럼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을 향한 깊은 배려를 보인다. 나의 확고한 믿음이 다른 불신자에게 또다른 피해가 될수있는데 다니엘은 성숙한 배려로 해결점을 찾고 있다. 사실 지혜롭다고 말하는 것이 단순히 방법론이 뛰어나다는 것이 아니다. 자신으로 인해 환관장과 다른 관리들이 낭패를 당하지 않도록 배려하고 있는 모습속에 지혜가 배려로 그리고 성숙으로 묻어나오는 것을 본다. 그래서 그의 신앙적인 결단을 불도저처럼 밀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신자들이 돕고 함께 할 수 있도록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배려를 실현하고 있음을 본다.

많은 사람들이 강력한 꿈이 있고 결단이 있으면 주도하고 건너뛰고 혼자 가는 경우가 많다. 결과 주변 사람들은 옆에서 신음하고 힘들어 하고 있고, 정작 본인은 어쩔 수 없는 희생으로 여기며 자신의 강력한 결단만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항상 발견하는 것은 신념이 있지만, 배려가 부족할때 마음을 얻지 못한다. 신학교 다닐때 신학생 5명과 논쟁을 벌여서 이겼던 적이 있다. 말 잘하는 신학생 5명을 혼자서 이겼다면 얼마나 말을 잘했을지… ^^ 그런데, 그 논쟁의 마지막에 내가 그 논쟁을 이긴 후, 그들이 나에게 한 말이 충격적이었다. “네 말이 모두 맞고 옳다. 우리가 틀렸다. 그러니 잘 ~ 해봐라.” 그날 밤 충격을 받고 많은 생각을 했다. 확고 부동한 꿈이 있고, 신념이 있었고, 말도 잘했는데, 아무도 동참하지 않았다. 부족했던 것은 배려였다.

다니엘의 확고한 꿈과 결단은 아름다운 배려로 말미암아 불신자까지 그 믿음의 결단을 돕게 만들었다. 불신자까지 믿음의 결단의 동역자로 만드는 다니엘과 달리,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확고한 믿음의 결단을 하면서도 같은 신자마저 등을 돌리게 만드는지 모른다. 확고하고 분명한 믿음의 길일 수록 배려가 있는 지헤가 필요하다.

 

지혜로운 믿음의 결단이 낳은 결과


첫째는 17절을 보니 배움의 한계를 뛰어 넘었다. 특히 다니엘을 완전히 영적인 새로운 깊이속으로 들어갔다. 이것은 곧 바벨론의 가르침의 한계안에서 잘했다는 말이 아니라, 그 가르침의 영역을 뛰어 넘어 버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바벨론이 원하는 제한된 울타리 안에서 세뇌교육을 잘 받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해버린 다른 차원의 탁월성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17절의 깨달아 알더라는 히브리어는 구별하여 이해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즉 무분별하게 다 배웠다는 말이 아니라 진리를 판결하고 거짓을 버려서 진리를 구별하여 알았다는 의미를 갖는다. 무당 교육을 받으면서도 구별하여 진정한 진리를 이해했고, 더 깊은 영성의 세계까지 발견했다는 것이다. 결국 바벨론의 교육의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승리가 이루어진 것이다. 결과 20절을 보니 같이 공부한 학생들 중에 전교 1등이 아니라, 같은 또래들 안에서 전국 1등이 아니라, 모든 무당과 박수를 뛰어넘는 시대의 지존의 자리에 선 것을 보게 된다.

둘째로 그의 이런 영향력은 후에 21절을 보니 고레스왕 원년까지 있었다는 것을 볼때 바벨론이 멸망하고 페르시아 제국이 들어서는 때까지 그가 관직에 있었음을 보이고 있다. 거의 70년간의 관직 재임왕이 바뀌어도 자리를 지키기 어려운 고대 왕권 사회의 정치판이다. 더더구나 왕조가 바뀐 상황이라면 관직 유지는 불가능의 이야기이다. 왕이 바뀌고, 왕조가 달라져도 관직을 유지했다는 것은 참으로 깊은 탁월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를 이렇게 세우신 이유는 무엇일까? 유대의 포로기 동안 하나님은 다니엘을 통해 포로된 백성들과 함께하셨던 것이다. 그를 통해 믿음의 모범을 세우셨고, 포로로 잡혀온 유대인들은 다니엘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바벨론에 우뚝선 다니엘을 통해 비록 바벨론이 유대를 멸망시켰지만, 하나님이 다니엘을 통해 바벨론을 움직여 가시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결국 무엇인가? 하나님은 결국 유대의 해방자 페르시아 제국의 고레스가 왕으로 세워기까지 다니엘을 통해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증거했던 것이다.

 

맺으며


주인이면서 노예로 사는 인생이 있다. 반면에 포로로 노예로 잡혀 온 땅에서 주인으로 사는 인생이 있다. 다니엘은 멸망당한 나라의 백성이 멸망한 나라를 다스리고 통치하는 삶을 살았다. 그의 아름다운 삶은 결국 마르둑 신이, 느브갓네살이, 바벨론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통치를 선포하는 삶이었다. 지혜로운 결단을 가진 꿈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 포로로 잡혀간 세상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이루는 사람들이다. 이 놀라운 역설이 이 시대에도 이루어지길 소망해본다.

멸망당한 나라의 신, 여호와가 포로로 잡아온 한 소년을 통해 제국의 심장부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실현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위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본다. 그래서 다니엘서는 우리에게 희망의 서신이다. 그래서 다니엘서는 우리에게 다니엘과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일어날 것에 대한 소망을 심어준다. 새해에 이 희망의 서신을 가슴에 품고 세상의 중심에서 믿음의 깃발을 휘날려보자. 주께서 그 소망을 반드시 이루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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