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설교

나는 성령님을 믿는다(5) / 계시록 3장 14-22절: 성령님은 우리를 부흥과 회개의 자리로 부릅니다

양치는선비 2010. 8. 20. 14:14

송병주 목사 (선한청지기교회)

 


1. 들어가며

 

우리 시대의 교회에 회개와 부흥이 필요하다. 집회를 다니다보면, 기도가 약하고 성령님을 사모하지 않는 신사적인 교회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런 교회일 수록 집회를 가면 그 교회 교역자들이 미리 자꾸 겁을 주며 예방주사를 놓아준다. “절대 통성기도하지 않는다. 반응이 적다. 그래도 다 듣는다. 등등그래서 다함께 통성기도하자고 했다가 한참 하다보니 대표기도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때도 있었다.

집회는 하지만 부흥을 기대하지 않는 교회, 부흥회는 하지만 회개를 촉구하지 않는 교회가 늘어가는 것은 안타까움이다. 잘못된 열광주의에 대한 반발이 차갑게 식은 얼음신앙이 될 수 없다.” 참된 회개와 부흥의 역사가 교회안에서 더욱 깊게 일어나야한다. 어린시절 엄마 지갑에서 돈 훔친 것으로도 회개하던 사람이 성령님의 역사앞에서도 세상을 흔들 사기를 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놀라울만한 평정심을 유지하는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은 결코 아름다운 신앙이 아니다.

잘못된 부흥주의의 영향으로 부흥자체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부흥의 본질을 보지 못한채, 부흥의 현상을 재현하려는 재방송 프로그램에 질리고 식상한 것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왜곡된 부흥운동으로 인해 부흥의 본질을 포기할 수는 없다. 부흥주의의 반대는 반부흥주의가 아니라 부흥이라 믿는다. 성령님이 역사하는 곳에 지금도 부흥과 회개가 역사하는줄 믿는다. 오늘 말씀을 통해 라오디게아화 현상에 빠진 시대의 교회를 향해 어떤 점에 부흥을 촉구하시는지, 어떤 점에 회개를 촉구하시는지 성령께서 교회를 향해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보자.

 

2. 미지근한 신앙을 향한 부흥을 회복하라.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성령님의 안타까움은 차지도 더웁지도 않고 미지근 하다는 평가로 시작 한다. 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갑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 필자는 미지근하지 말라. 차갑든지 뜨겁든지 하라.”는 지적을 통해 성령님은 부흥을 기대하신다고 정리해본다. 

어떤 불신 남편이 교회와서 이 말을 잘못 이해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다. “오늘 라오디게아 교회를 책망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미지근한 것이 큰 잘 못이란 것을 알고 마음을 확실하게 결단하기로 했습니다. 확실하게 차든지 확실하게 뜨겁든지 하라는 말은 신앙생활을 하지를 말든지 아니면 확실하게 뜨겁게 해야지 미지근하게 하면 안된다는 말이라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저는 미지근하게 하게 신앙생활 하지말고, 확실하게 신앙생활 안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신앙생활을 확실하게 하든지 아니면 하지 말든지를 말하는 본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또 헷갈리는 것은 뜨겁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차갑게 신앙생활을 해야할까?” 어느것이 맞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만약 누군가가 나는 뜨겁지 말고 차갑게 이성적이고 말씀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한다면 미지근하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반면에 누군가가 나는 차갑지 않고 뜨거운 성령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며 한 우물만 파겠다고 한다면 옳은 것일까? 오늘날 장로교회는 냉장고 옆에 가보고, 오순절 교회는 난로옆에 가보라는 농담을 하는데, 과연 그렇게 가는 것이 오늘 말씀을 잘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필자의 생각에는 귀있는자는 들으라고 하신 성령께서 오늘 말씀을 통해 기대하는 것은 양자 모두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라오디게아라는 도시를 좀더 알 필요가 있다.

라오디게아는 관문도시로 지정학적 중요성을 갖고 있었고 모두가 거쳐가는 곳으로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고, 그래서 부요한 도시였다. 하지만, 문제는 물 부족이 항상 문제였다. 하지만, 부요한 도시답게 수로를 만들었다. 그래서 북쪽 10km 떨어진 온천도시로 유명한 히에라볼리로부터 뜨거운 온천수를 공급받았고, 골로새서로부터는 찬 냉수를 공급받고 있었다. 그런데 수로를 따라 이동해 온 물은 기후에 따라 온천수는 온천수대로, 냉수는 냉수대로 미지근해졌고,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이것을 싫어했다. 물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지만, 뜨겁지 않거나 차갑지 않은 물은 뱉어버릴 만큼 싫어했다.

이런 배경을 볼때, 오늘 말씀은 차갑거나 뜨겁거나 둘중의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차가우면서 동시에 뜨거운 신앙생활을 기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신들이 미지근 한 것을 원하지 않고 뜨겁고 차가운 물을 다 원한 것처럼, 성령님도 두가지 모두 원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영혼의 목마름과 기갈을 해결해줄 생수같은 신앙과 영혼의 뜨거움을 회복시킬 온천수같은 신앙이 모두 필요하다는 것이다.

성령님은 적당하게 기만적 신앙생활 결코 기대하지 않으신다는 점이다. 성령충만 하지 않으면서 자신은 말씀 중심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그리고 물어보면 빌레몬서가 신약인지 구약이지도 모른다. 성령충만하지 않으면 말씀중심인줄 아는 데 착각중의 착각이다. 반면에 성경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으면, 자신은 성령중심의 사람이라서 그렇다고 한다. 뜨겁기만 하면 성령충만일줄 아는데, 사실은 감정충만인 경우가 더 많다. 위의 양자 모두 이것도 저것도 아닌 미지근한 신앙일뿐이다. 어찌 말씀을 사모하는데 성령충만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찌 성령충만한데 말씀을 사모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런 식의 극단은 거짓이다.

헌신과 결단이 없는 신앙생활도 미지근한 토하고 싶은 신앙이다. 고등학생 시절, 예수님을 처음 만나서 열심히 성경읽고 복음을 전하자, 평소에 조용하고 말없던 친구가 조용이 불렀다. 그리고는 나에게 너무 기독교인 티를 내지 말고 조용히 좀 살아라. 너도 사람이라서 실수할 수 있으니 네가 실수하면 하나님 영광을 얼마나 가리겠느냐? 나도 교회 다니지만, 나로 인해 하나님 영광 가리지 않도록 기독교인인 것을 절대 티내지 않고 산다. 너도 조심해라.” 순간 헷갈려서 아멘할뻔했다. 완전히 내가 기독교인인 것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정신으로 사는 것이었다.

헌신과 결단을 피하는 마음, 일주일에 교회를 2번 나오면 큰 희생을 치루고 에베레스트 정복한 것 같은 마음을 성령님은 토하고 싶어하신다. 미지근한 것이 균형이 아니라 시원한 생수와 뜨거운 온수가 다 있어야 균형을 잡은 것이다. 잘 균형을 이룬 것과 적당주의는 분명코 다르다. “적절하게하라는 말과 적당하게하라는 말은 비슷하지만 다르다. 미지근함과 같은 영적 적당주의, 적당히 걸치고 다니는 신앙생활을 향해 성령님은 부흥을 기대하신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지혜롭게 신앙생활한다고 생각했지만 성령님은 미지근한 영적 적당주의로 여기시면서, 시원한 생명수같은 말씀의 부흥과 뜨거운 온천수같은 성령의 부흥을 촉구하신다.”

 

2. 부족한 것이 없다는 위선을 회개하라.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두번째 냉철한 평가는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며 자신이 죄인인 것과 가련한 것을 전혀 모르는 모습이다. 17절을 보면,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지혜롭게 균형있게 한다고 여긴 것을 영적 적당주의와 미지근한 신앙을 말씀하셨듯이, 성령님은 겉만 번지르하여 부족할 것이 없다는 교만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강력한 회개를 촉구하고 있다.

이 표현을 또한 바로 알려면, 라오디게아 지역의 특징을 알 필요가 있다. 사실 오늘 이 표현은 라오디게아 최고의 자랑,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것을 공박하며 그들의 위선과 허구를 실랄하게 드러내고 있다. 라오디게아 지역은 최고 부촌이었고 드물게 금융업이 가장 발달하여 월가(Wall Street)와 같은 도시였다. 그래서 당시 화폐 기준인 금과 은이 풍부하게 발당한 금융 중심의 도시였다. 그리고 검정색 양모가 특산물이었기에 당시 로마 세계를 향해 최고급 양모를 수출하고 있었으며, 그렇기에 입는 것만큼은 앞서가는 도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라오디게아는 당시 유일한 특수 안약 제조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의학교를 운영할만큼 탁월한 의료도시였다. 그러므로 병에 대해서 특별히 눈병과 관련되어서는 최고를 자랑하는 도시였다.

그런데 이 도시를 향해, 성령님은 너희가 가난하고, 옷을 벗었으며, 눈먼 것을 보지 못한다고 도전한 것이다. 금과 은이 가득하고, 화려한 옷이 넘치고, 질병 치유하는 능력을 갖고 부요하다고 말하지만, 너희 내면은 가난하고, 벌거벗었고, 눈이 멀어서 가련하다고 말한 것이다. 왜 육적인 것만 보지 영적인 것을 보지 못하느냐고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인 것을 전혀 보지 못하면서 육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속이는 위선적 신앙에 대해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육적인 번영의 논리에 빠져 영적인 빈곤을 보지 못하는 것에서 진정한 회개의 필요성을 발견한다.

오늘 이 시대의 교회를 보며 필자는 교회가 라오디게아화 현상에 빠져있다고 말하고 싶다. 하나님 없어도 부요하고, 화려하게 꾸미고, 병도 고치고 사는데 특별히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외양을 꾸밈으로 내면의 허전함과 가련함을 숨기고 서로를 속이는데 익숙해진 세상과 교회의 모습이다. 하나님도 그저 악세사리처럼 약간의 add up된 요소처럼 자리잡아서 회개가 없는 모습, 이정도면 되었다는 위선과 기만의 신앙을 말한다. 끊이지 않는 정신적인 질병과 고통, 그리고 자살과 윤리적 타락속에 방황하지만 번지르한 외양으로 자신을 속이는 상태, 그래서 통회하는 울부짖음과 회개를 잃어버린 교회의 모습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가련함을 숨기기 위해 외적인 번영으로 자신의 가련함과 가난함을 숨기고 사는 것을 본다. 추악함을 숨기기 위해 미스코리아의 가면을 쓰고, 무지함을 숨기기 위해 학자의 가면을 쓰고, 두려움과 무서움을 숨기기 위해 독재자의 가면을 쓰는 것이다. 멋지고 한량처럼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얼마나 깊은 가련함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경남 지방에서 밍크 코트를 입고, 다이아몬드와 사파이로 반지로 2-3개씩 손에 꼽고, 우아하게 말하며 살지만, 사실은 그 마음의 가련함을 모두 안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님은 도전한 것이다. 나에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고, 흰옷을 사서 수치를 가리고, 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하라고 도전한 것이다. 지금껏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금이나 옷이나 안약과 관련 되어서 buyer가 된 적이 없다. 늘 그들은 seller였다. 하지만, 성령님은 오늘 나에게 사서라는 표현을 3번이나 사용하며 적극적으로 나오라고 도전하고 있다. 팔기만 했던 그들에게 이제 사라고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자랑하고 잘나고 가지고 누리던 것들 갖고 폼잡지 말고 진정으로 가련함을 보라는 것을 강력하게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이 가진 금덩이 보지 말고, 검은 양모 보지 말고, 안약 자랑하지 말고 너희의 가련함을 보고 나와서 엎드리라는 도전인 것이다. 말 그대로 껍데기는 가라는 것이다.

 

3. 우리의 갈길 부흥인가 대박인가?


그러므로 이상의 2가지 지적을 종함하여 19절은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미지근한 신앙을 향해 열심을 내라그리고 위선적인 신앙을 향해 회개하라고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는 것을 부흥과 회개로 정리하고 싶다. 미지근한 신앙은 부흥하고, 위선적인 신앙은 회개하라는 것이다. , 부흥은 회개를 초래하고, 회개는 다시 부흥을 초래하는 그 역사가 라오디게아 교회안에 일어날 것을 촉구한 것이다.

오늘 이 시대에 성령과 부흥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다. 성령님을 말하는데 회개가 없다. 부흥을 말하는데 양적 성장만 있지 회개가 없다. 오늘 시대의 문제는 성령의 역사가 없어서가 문제가 아니라 회개없는 성령의 역사가 넘치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문제는 부흥이 없어서가 아니라 회개없는 부흥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문제는 은사와 능력이 없어서가 문제가 아니라 회개없는 은사와 능력이 판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대의 문제는 감동적인 예배가 없어서가 문제가 아니라 성령없이 회개없이 감동적인 예배가 드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회개없이 부흥한다면, 그것은 대박이지 부흥이 아니다.” 때로는 우리의 기대가 부흥이여 다시 오라 인지 대박이여 다시 오라인지 헷갈릴때가 너무 많다. 필자는 우리 교회가 대박맞은 교회가 아니라 부흥을 경험하는 교회가 되길 소망한다. 무조건 빠른 성장이 있다고 좋아해서는 안된다.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것은 암조직이다.회개 없이 빠르게 소위 부흥 성장한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가 될 것이다.” 참된 부흥을 위해 우리는 영적인 눈을 열어 최고 부요한 곳에서 영적인 곤핍함을 보며 회개해야 한다. 참된 부흥을 위해 우리는 영적인 눈을 열어 최고급 검은 양모를 입은 모습속에서 벌거벗은 모습을 보며 회개해야 한다. 참된 부흥을 위해 우리는 영적인 눈을열어 최고급 안약과 의대를 갖고도 우리가 보지 못하는 불쌍한 인생임을 고백해야 한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부흥이다. 회개가 있을때, 이때 성령이 주신 부흥의 역사가 우리 가운데 임할줄 믿는다.

 

4. 보여주신 환상

 

개인적으로 성령론 주제강해를 하면서 기도했다. 이 시대의 교회를 보시는, 우리 교회를 보시는, 아니 나를 보시는 성령님의 시각이 어떤지 알고 싶어서 기도했다. 그러다가 장로교 목사 답지 않게 새벽기도 시간중에 짧은 환상같은 그림을 보았다. 성령께서 주신 것이라고 믿는다. 강력한 불꽃이 일어나는 화로가 있었는데, 그 위에 매우 큰 솥이 있었다. 성령의 불꽃이 타오르는 것을 보며 환호하며 그 솥 두껑을 열었는데, 그 안을 들여다보고 깜짝 놀랐다. 물이 끓고 있었는데 그 끓는 물속에는 불타올라야 할 차코가 들어있는 것이었다. 놀라서 건져보니 끓는 물속에 있어서 매우 뜨거웠지만, 전혀 불타지 않는 차코손으로 살짝 쥐니 부스러져 버리는 쓸모없는 폐탄이었다. 성령의 불꽃은 있지만, 타올라야 할 교회는 젖은 폐탄이 되어 뜨겁기는 하지만 불타지 않는 형상이 성령께서 보여주신 그림이었고 환상이었다.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신비주의자처럼 여겨질까 걱정도 있고, 그림 봐달라고 부탁할 사람있을까 걱정도 된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코 성령께서 주신 그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시대의 교회가 뜨겁기는 한데 끓는 물속에 있는 차코 같은 모습이라면, 아무리 성령의 불꽃이 넘쳐도 결코 타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많은 고민과 묵상을 하게 된다. 솥 안에서 끓는 물속에 있어선 안될 것을 다시금 발견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차코 전골을 만들고 싶으신 것이 아니라 성령의 불꽃과 더불어 불쏘시개가 되길 원하신다.

 

5. 맺으며 누구든지 문을 열라.


20절 본문은 잘못 이해해 온 가장 전형적인 본문중의 하나이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보통 이 말씀은 불신자들을 위한 전도용 메시지로 영접할때 주로 사용하는 본문이었다. 그래서 불신자들을 향해 지금도 안타깝게 예수님이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것처럼, 그래서 예수님을 영접하라는 영접용 말씀으로 생각해 왔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이것은 불신자의 마음의 문을 여는 본문이 아니라, 라오디게아 교회 문밖에 서서 교회에게 문을 열라고 두드리시는 주님의 모습이다.

주님이 주인이 아닌 교회, 주님을 모시지 않는 교회가 있음을 보여주는 충격적인 말씀이다. 모든 것을 갖추고 부요하고 풍성한 교회인데, 지혜롭게 적절하게 신앙생활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교회인데, 그 교회를 향해 주님이 들어가고 싶다고 문을 두드리신다는 도전은 매우 충격적이다. 예배가 드려지고 있고, 기도회가 정기적으로 열리며, 설교가 행해지고 있으며, 봉사가 넘치는 교회인데, 주님이 계시지 않다는 도전인 것이다. 이 충격적인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서 주님은 누구든지 문을 열라고 촉구하고 계신다. 많은 사람을 요구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라도 그 음성을 듣는 사람, 이 교회의 주인이 주님이심을 인정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라고 그 문을 연다면 그 교회에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누가 과연 이 한 사람이 될까?

누구든지한 사람이라도 교회의 주인이 주님이 되시도록 그 음성을 듣고 문을 연다면 그것은 바로 회개의 문이 될 것이고, 그 회개는 풍성한 부흥의 식탁으로 우리를 초대할 것이다. 역사적 라오디게아 교회는 폐허로 끝나버렸지만, 이 시대의 라오디게아 교회는 어떻게 될까? 라오디게아화 현상을 보이는 이 현대의 교회들이 다시금 실패한 라오디게아 교회의 길을 전철을 밟지 않도록 음성을 듣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예수님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이 된 이 시대의 라오디게아 교회안에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시 위해 그 문을 열 하나님의 사람이 이제 필요하다. 이 소명을 붙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