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설교

디도서 강해1 / 인격과 신념이 사랑과 의분으로 나타나는 삶

양치는선비 2010. 10. 1. 03:15

1:5-16  /  송병주 (선한청지기교회) 

 

리더십을 견고히 세우는 교회

 

그레데에 디도를 보내었던 이유는 5절에서,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장로들을 세우려 함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부족한 점을 바로잡고 교회를 바로 세우는 일에서 빠질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일은 사람을 세우는 일이다. 위기가 있을 수록 더욱 중요한 일은 책임감있는 사람들을 세우는 일이다. 특히 목회 리더십과 평신도 리더십을 견고히 세우는 일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그 점에 있어서 우리는 더욱 사람을 세우는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

디도는 자기 리더십의 강화보다는 더 많은 리더들을 세우는 사명을 감당하고자 했다. 많은 경우 목회자들이 당회때문에 힘들다고 한다. 할 수 만 있다면 장로 직분을 세우는 일을 최소화하려고 한다. 이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하나님이 교회를 향해 기대하시는 것은 당회없는 목회자의 교회도 아니고 당회와 목회자가 갈등하고 대결하는 교회도 아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장로와 목사가 아름다운 동역을 이루는 교회이다. 장로들을 세우는 일, 더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온전히 섬기게 하는 일이 디도의 사명이었다. 교회는 훌륭한 리더들을 통해 더욱 견고하게 세워져 가는 것이다.

많은 리더들을 세워야 한다고 해서 남발하듯이 아무나 직분자로 막 세우면 될까? 결코 그럴 수 없다. 바른교훈을 전하기 위해서 지도자를 세우는 일이기에 더욱 잘 준비되어야 한다. 그래서 바울은 어떤 사람들을 지도자로 세워야 할지 디도에게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필자는 오늘 말씀을 통 한마디로 인격과 신념이 사랑과 의분으로 나타나는 사람으로 제시하고 싶다.


바른교훈을 전하기 전에 갖추어야 할 것 인격과 신념이 함께하는 삶

 

사실 그레데는 바른교훈이 가장 중요한 이슈였다. 할례당의 유대주의적 영향과 영지주의 이단들로 인해 매우 혼탁한 가르침이 교회와 가정을 파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악한 교훈과 대적하고 바른교훈을 탁월하게 가르쳐야 할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조건은 누구보다 탁월한 지성과 언어적 설득력을 가진 사람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요구하는 기준은 좀더 다른 면에 집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6절은 먼저 아름다운 가정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7-8절은 인격적인 성숙과 깊이와 구제와 돌보는 삶이 먼저 준비되어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말씀을 잘 가르치는 기능을 우선적으로 강조하기 보다는 인격을 갖춘 사람을 전제하고 있다. 한마디로 스펙이 아니라 성숙이다. 말씀의 교훈을 바로 세우는 그 일을 위해서 필요한 것은 훌륭한 학원강사 같은 teaching skill이 아니라 인격적인 바탕이다. 더구나 바른교훈은 필연적으로 책망이 따라오기 때문에 더욱 인격적 준비가 필요한 것이다.

9절을 보면, 이런 인격적인 준비가 필요한 이유가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고 보여준다. 바른 교훈에는 책망이 따라온다.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것이 바른 교훈이 아니다. 바른 교훈이기에 책망이 따른다. 그러나 주의할 것은 책망만 잘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책망하려면 책망할 자격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른 교훈을 하는 사명을 감당하려면 바른 교훈을 잘 알고 잘 말하는 것보다, 그 교훈대로 살며 인격과 삶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바른교훈을 전할때 갖추어야 할 것 사랑과 의분이 함께하는 삶

 

갈수록 어려운 것은 세상에 악한 교훈이 넘쳐흐른다는 것이다. 바른 교훈으로 책망하는 것을 바울은 2가지 행동으로 표현하고 있다. 10, “저희의 입을 막으라” 12저희를 엄하게 꾸짖으라이 성경 구절 만으로도 만만치 않게 강한 표현인데, 어원적 의미를 살펴보면 더 강하다.  10절은 재갈을 물리라는 표현에서 나온다. 그리고 12절의 엄하게는 칼로 베듯이 꾸짖으라는 정죄하라는 어원을 갖는다. 한마디로 짤라 버려에 가까운 표현이다.


왜 이렇게 과격한 언사를 사용할까? 그것은 단순히 지도자가 칼 휘두르는 자리라는 권세가 있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향한 사랑의 결과다. 11절의 개역개정은 마땅하지 않은 것들을 가르쳐 가정들을 온통 무너뜨리도다고 한다. 거짓된 신앙과 가르침이 위험한 것은 그것이 단지 신학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파괴시킨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거짓 신앙이 가정을 파괴하는 상황에서도 유보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일이다. 이처럼 무서운 책망을 하는 것은 책망하기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라, 성도들을 향한 사랑과 그 사랑으로 인한 의분때문인 것이다.

하나님의 세우심의 받은 직분자들은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가운데 있는 주님의 양들을 향한 사랑과 그 대적들을 향한 거룩한 분노가 있어야 한다. 바른교훈은 탁월한 강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도들을 지키고자 하는 거룩한 분노속에 있다. 하나님은 사람들은 인기 강사가 되고자 부름받은 것이 아니다. 수사학에 물든 교훈이 아니라 사랑과 의분이 있는 투박하고 거친 진실이 증거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