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설교

디도서 강해 3 / 하나님의 은혜가 하는 일

양치는선비 2010. 10. 1. 03:47

2:11-15

송병주 (선한청지기교회)

 

 

첫째.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No”라고 하게 합니다. 그리고…  / 12-13

 

오늘 12절 본문은 영어로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It teaches us to say “No”. 11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헤가 우리로 하여금 경건치 않은 것과 세상의 정욕에 대해 단호하게 아니오라고 대답할 수 있게 가르쳐 주신다는 것이다. 은혜는 대충대충 넘어가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악한 것에 대해 단호하게 No라고 대답할 수 있게 한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은 경건치 않은 것과 세상의 정욕에 대해 어물쩍 해서는 안된다. 단호해야 한다. (송도 고개 조크) 연습해 보아야 한다. No!!!

하지만, 이것은 결코 No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불경건과 정욕으로 가득한 세상속에서 근신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살게하신다. It teaches us to live self-controlled, upright, and godly lives in this present age.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세상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이런 세대속에서도 거룩한 삶을 살도록 가르치신다. 영화 Sound of Music에서 이런 노랫말이 나온다.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은 세상을 떠나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그들을 섬기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더러움에 대해 단호하게 No를 말하지만, 분리된 삶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세상속에서 거룩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하신다. 은혜를 누리는 삶은 집구석을 떠나 지겨운 payment를 벗어나 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 한복판에서 세상과 다르게 살면서 누리는 것이 참된 은혜인 것이다. 그래서 힘들지만, 소망을 안고 그 영광의 날을 향한 기다림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둘째. 은혜는 우리를 친 백성으로 세웁니다. / 14

 

은혜를 안고 세상속에서 No를 말하며 거룩을 추구하는 삶을 인내와 기다림속에서 지켜갈때, 14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친백성이 되게하신다고 약속하신다. “친 백성이라는 이 헬라어 단어는 개인이 소유하고 숨겨둔 특별한 보물이라는 히브리어를 번역할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힘들고 지치고 포기하고 싶을때 이 반지 기억하며 애미가 포기않고 살아온 세월 생각하며 이겨내라.”고 하시며 시집갈때 엄마가 손에서 빼어주신 금가락지 같은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하얀 천에 싸서 장롱속 깊은 곳에 꼭꼭 모셔두었다가 설움과 절망의 눈물이 왈칵 쏟아져서 양잿물 마시고 더 이상 인생 살고 싶지 않을때 꺼내보고 엄마생각에 눈물 흘리다 다시 살 마음 다져 먹게 만드는특별하다 못해 마음 시린 추억이 담긴 보물같은 것을 말한다.

그렇지 않겠는가? 험한 세상속에서 No하며, 거룩을 추구하면서 끝까지 그 영광의 날까지 기다림의 자리를 지키는 성도를 보면서 어찌 특별한 보물처럼 여기고 싶지 않으시겠는가?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들이, 우리 주님의 숨겨진 보석들이 되기를 축복하고 싶다. 너무 귀해서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고 꼭꼭 품에 안고 간직하고 싶은 보석같은 존재들이 되기를 축복하고 싶다. “너는 내 친백성이라너는 내 품에 간직한 보석이니라그런 위로의 음성을 듣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복한다.


셋째. 은혜는 권면과 책망의 권위자로 우리를 세웁니다. / 15

 

이런 정체성을 가졌기에 우리는 참된 권위를 갖게 된다. 우리를 친 백성으로 여겨주시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는 참된 권위자가 되는 것이다. 권위자는 어떤 일을 하는가? 바로 권면과 책망이다. 여기서 권면은 Encourage이고 책망은 Rebuke이다. 이 두가지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균형을 이루어야 할 아주 중요한 덕목이다. Rebuke만 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동시에 Encourage 만 해서도 안된다.

격려면 한다면 비겁한 삶이다. 문제점 앞에 직면하고 갈등의 냄비속에 떠오르는 진실을 피하는 비겁함이 있다. 어렵고 더럽고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는 비겁함이 있을 뿐이다. 반대로 책망만 한다면 무책임한 삶이다. 격려 없는 책망속에는 변화에 대한 기대가 없다. 책망만으로 변화되지 않기에 격려없는 책망은 무책임한 파괴에 불과하다. 참된 하나님의 세움 받은 백성은 격려와 책망의 황금 비율을 찾아내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언제 격려하고 언제 책망할 것인가? 격려는 잘하고 있는 사람일수록 격려가 필요하다. 잘하고 있기에 격려하지 않으면 반드시 도태되고 무너진다. 그래서 잘하는 사람일 수록 격려가 필요하다. 그리고 격려는 잘못한 일이 있을때 더욱 필요하다. 사고치고 문제났을때 그때 격려가 필요하다. 스스로 잘못을 아는데,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어?” 하는 것은 가장 바보같은 말이다.

반면에 책망은 습관적인 죄와 안주하고자 하는 게으름을 향한 것이다. 한번의 잘못이 아니라 이것이 습관화되고 중독현상을 보일때 강력한 책망이 필요하다. 격려는 큰 잘못에 필요하다면 책망은 작아보이고 사소해보이는 습관적인 거짓말과 지속적인 중독에 필요하다. 그리고 안주하고 게을려지기 시작할때 필요한 것이 책망이다.

우리는 문제는 격려해야 할 자리에 책망하고 책망해야 할 자리에 격려하는 문제를 갖고 있다. 참된 권위는 이 2가지의 역할을 잘 수행해야 한다. 교회안에 이런 아름다운 자리 매김을 할 사람들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아름다운 직분, 잘 감당하기를 축복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