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과유감

최순실 게이트를 통해 본 한국교회 민낯

양치는선비 2016. 11. 10. 15:28

최태민의 길에 선 한국교회의 민 낯


송병주 목사 

 


목사를 사칭한 선무당만 문제일까?

 

            개신교 목회자와 교인들이 최태민은 목사가 아니다고 말한다. 지금 상황으로 볼 때 전직 무당이고 신학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사람에게 목사 안수를 주고 목사로 받아준 어처구니 없는 교단과 목사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최태민만 문제일까? 아니면 돈을 받고 목사 안수를 준 교계 지도자들이 더 문제일까? 우리가 더 가슴아프게 돌아봐야 할 문제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최태민이 왜 목사를 사칭하고 기독교의 간판을 사용하려고 했는지 생각해 봐야 할 때인 것 같다. 필자를 슬프게 하는 그 이유는 선무당이 목사를 사칭하고 교회를 벤치 마킹하는 것이 돈과 권력을 갖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가 개최한 십자가 구국 기도회 영상을 보고 있지니 선무당에게 놀아나는 한국 기독교 민낯을 보는 듯하다.

            최태민은 목사가 아니다고 강변하는 교계의 모습을 보노라면 마음이 서글프다. 목회자들이 선무당 노릇을 하고 있는 마당에 선무당이 목사 사칭했다고 과연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 싶을 정도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앞둔 499주년에 우리의 모습이 어떤지 하나님이 분명히 보여주셨다는 생각이 든다. 독버섯이 살기 좋은 환경을 만들어놓고 독버섯을 키운 기독교계가 "저건 종류가 다른 독버섯이다"고 화내는 모양새 같아 부끄럽기만 하다.

             목사를 사칭한 선무당만 문제일까? 목사를 사칭하고 교회를 벤치 마킹한 선무당 최태민의 성공을 지켜보면서 교계 지도자들이 그런 최태민을 벤치 마킹한 모습이 더 심각하다는 생각이든다. 이런 최태민에게 목사 안수를 주고, 거꾸로 최태민 흉내내기를 한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은 더욱 회개해야 한다. 

 


십자가 구국 선교회를 벤치마킹한 사람들 - 최태민의 길 

 

            최태민의 '십자가 구국선교회'와 '새마음 봉사단' 같은 단체가 빠른 시간안에 권력과 부를 모을 수 있었던 3가지 방법이 있다. 이것은 단기간에 금력과 권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장기적인 지속성까지 보여주었다. 그 덕에 이들은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영향력을 가졌다고 본다. 

            문제는 이들의 3가지 방법을 일부 기독교계 지도자들이 벤치 마킹했다는 점이다. 놀랍게도 교계 지도자들이 최태민의 길을 걸어왔고, 지금도 가고 있다. 최태민은 교회가 타락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고 어떤 교계 지도자들은 그 미끼를 물었다. 그가 한국 교회에 가르쳐준 3가지 방법을 정리해 보고 싶다.  

            최태민이 사용한 첫번째 방법은 빙의와 접신을 변형시킨 예언 사역이었다. 익히 알려진대로 최태민은 고 육영수 여사의 빙의를 통해 고통가운데 있는 영애 박근혜양을 찾아서 예언을 하고 영향향력을 갖기 시작했다. 무당의 접신도 어떻게 하면 성령사역처럼 오용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그리고 인생의 절망과 고통에 빠진 사람을 어떻게 이용하면 되는지 보여주었다. 오늘날도 이 방법을 벤치마킹한 사람들이 여전히 상처 입은 영혼들을 노략질 하고 있다. 가장 하나님이 가증스럽게 여기는 일을 가장 하나님의 역사처럼 속이는 이들이 여전히 목사의 이름으로 최태민의 길을 가고 있다. 

            최태민이 사용한 두번째 방법은 유력한 정치인의 권력과 종교의 야합이었다. 당시 영애 박근혜양을 붙들고 그들은 권력을 등에 업었다. 정치권력과 결탁한 종교는 필연적으로 종교 권력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야합은 종교 권력 범주를 넘어 경제권력과 정치권력까지 관철한다. 왕이되고 지도자가 될 필요 없이 왕과 지도자를 움직이는 길을 보여주었다. 지도자가 되는 길 보다 지도자의 하늘이 되는 법을 이용한 사람들이다. 그렇게만 하면 대기업의 돈과 국가 권력을 얼마든지 사유화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오늘날도 이 방법을 벤치마킹한 사람들이 여전히 권력을 향한 추파를 던지고 있다. 권력과 결탁하려는 최태민의 길을 교계 지도자들이 지금도 걸어가고 있다. 

            최태민이 사용한 세번째 방법은 반공을 내세운 애국주의였다. 반공과 애국은 입장과 시대에 따라 그 자체로서 긍정적인 신념이다. 필자 역시 애국의 가치를 존중하고 그 길을 가고싶다. 또한 종북을 거부하고 반공의 입장이다. 하지만 그 시대의 반공과 애국은 친일파와 군사독재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정치논리로 악용되던 시대이기도 했다. 최태민은 친일과 독재를 방어하기 위해 반공과 애국을 정략적 논리로 사용하던 정부의 필요에 충실히 복무했다. 그것은 당시 민주화 운동의 중심지인 기독교계에 대한 기독교 내의 대항세력 혹은 분열세력의 출현을 바랬던 정권의 입맛에도 잘 맞았다.

이로써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변질된 반공주의와 애국주의였지만, 권력의 정략적 지원을 얻는 좋은 수단이었고, 또한 돈과 권력을 얻는 통로가 되었다. 이것을 거부하면 빨갱이와 매국노 그리고 반정부세력을 몰릴 판이니, 누구든 눈치보고 지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것은 금력과 권력을 동시에 주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오늘날도 이 방법을 벤치마킹한 사람들이 신념이 아닌 정략적 논리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이 방법은 여전히 효과적이다. 이들이 국가와 이념을 위해서 그랬을까? 그저 권력과 돈을 위해서였을 뿐이다. 분단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가진 아픈 국민들을 이용하여 애국의 이름으로 도둑질을 했을 뿐이다. 지금도 일부 교계 지도자들이 애국과 반공의 이름으로 상처와 트라우마를 가진 백성들을 이용하여 최태민의 길을 가고 있다. 

            이처럼 최태민은 이 3가지 방법을 가장 잘 사용한 사람이었다. 그가 처음에는 목사를 흉내내고 교회를 벤치 마킹했지만, 이후에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최태민을 흉내내고 십자가 구국 선교회를 벤치 마킹했다. 선무당 최태민이 목사가 되고 이 3가지 방법으로 성공한 이후, 교계가 최태민의 선무당 흉내를 내는 최태민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면 과연 과언이기만 할까? 분단의 아픔과 상처를 싸매어야 하는 길보다 큰 아픔과 상처를 이용하여 세습과 부패를 방어하고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하는 모습에서 일부 교계 지도자의 모습에서 최태민의 길이 보이는 것 같다. 

 


최순실 자매와 모녀는 교회에서 행복했다.

 

            `최순실 모녀와 최순득 모녀는 아버지의 종교적 영향을 이어 받은 후계자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강남의 대형교회들을 꾸준히 다니며 감사헌금과 기도제목을 꾸준히 내는 충실한 교인들이었다. 대학과 스포츠계와 정치계와 경제계를 망치는 일을 하며 선무당같은 아버지의 일을 이어가면서도 교회 다니며 기도 부탁을 하는 나름 행복한 교인이었다.

            이들이 교회를  몇 십년을 다녔지만, 정말 그들에게 복음은 무엇이었까? 결국 교회들을 방문하고 다닐 때 그들이 드린 예배와 들었던 설교가 그들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변화는 고사하고라도 그 교회에서 전해지는 설교가 양심에 조금이라도 부대끼게 하지도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면 가슴이 무너진다. 부정적인 방법으로 천문학적인 부를 축적하고, 그런 선무당적 종교성을 이어받은 후계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부담없이 행복하게 교회를 다녔다.

            이들 뿐 아니라 또다른 문제의 원인인 차은택씨의 경우에도 이런 게이트 속에서 누린 성공을 크게 쓰임받게 해달라는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간증을 했다. 우리의 신앙은 선무당과 불법을 은혜와 축복으로 설명하는 도구가 되었다. 그들에게 교회는 전혀 불편한 곳이 아니었다. 이처럼 교회는 순실한(?) 기독교인들에게 편한 곳이라는 우리의 어그러진 자화상이 보인다. 

사찰과 무당집을 다니며 교회와서 기도받고 헌금하고, 선무당과 불법을 자행하면서도 전혀 불편하지 않은 교회여기서 필자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이것이 어떤 죄인도 품어내는 깊은 사랑 때문일까? 아니면 죄에 둔감하고 물든 우리의 타락 때문일까? 한편으로는 어떤 죄인들은 들어올 수 없는 불편한 교회를 만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어떤 죄인들은 부담없이 들어올 수 있는 편한 교회를 만들어 온 것은 아닌지 시름만 깊어진다.

최순실은 지금 이 시대의 교회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피할 수 없는 현실은 이들이 자신을 감추고 활동하고 보호받기에 최적의 장소가 교회였다는 점이다. 괴물만 탓하고 넘어갈 수 있을까? 우리는 그 괴물이 편안하게 틀었던 둥지였는데

 

시국선언 전에 시교회선언이 필요한 듯

 

최순실 게이트를 비판하면서도 부끄러워 말을 못하겠는 이유는 이들이 한국교회의 실상을 모두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제2, 3의 최태민과 최순실이 한국 교회안에 보이는 듯 하다. 십자가 구국 선교단 같은 모습이 과연 최태민이 일으킨 한 때의 스캔들이기만 할까?

선무당의 접신을 예언사역처럼 백성을 미혹하며, 권력과 결탁하여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모습은 지금도 유효하다. 정략적 측면으로 반공과 애국을 이용해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여 부패 권력의 후광을 얻어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과정을 종북과 매국으로 몰아가는 모습 말이다. 과연 우리가 최태민이 걸어온 길과 다르다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더 큰 문제는 최태민이 교회를 벤치 마킹한 것이 아니라, 교회가 최태민을 벤치 마킹한 것이다.

            교회는 이번에 역사앞에서 부끄러워해야 한다. 누구나 속을 수 있고 잘못할 수 있다. 하지만, 교회인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었는지 직면하지 않은채, 최순실 한 사람 비난하며 빠져나가려는 것은 반칙이다. 이번 일에 대해 교회는 스스로에게 특검을 해야하며 부검을 해야 한다. 역사의식의 부재와 영적 분별력을 잃어버린채 걸어왔던 교회의 부끄러운 취중행보를 회개하고 사죄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도 민주주의를 지키자는 절규에 종북타령 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이런 상황을 겪으면서도 인지부조화에 빠져서 스스로 합리화 시키려는 자폭적 시도를 해서는 안된다.  

지금 상황은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보수와 극우를 구별시켜 주는 사건이다. 이런 일을 겪고도 교회가 교훈을 얻지 못하면, 교회는 또 다른 괴물의 둥지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지금 우리는 시국선언을 하기 전에 시교회선언부터 해야 할 상태다. 

이번에 깊은 고민과 결단을 해야 한다. 교회는 계속해서 최태민의 3가지 길을 갈 것인가? 그리고 교회는 최순실이 누린 평안을 계속 제공할 것인가?” 이 질문앞에 진지하게 답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좀 부끄러워하자. 그리고 이제는 좀 미안해하자. 한국의 보수교회들이 얼마나 무분별하게 지난 시간을 보내었는지 한번 쯤이라도 돌아보고 자숙해야 도리가 아닐까? 교회는 역사앞에 사죄하고 우리가 최태민의 길을 걸었음을 고백하고 회개해야 한다. 몰랐다고 발뺌하는 여당의 친박 지도자들 흉내를 내며, 무당 탓하고 욕하는 어설픈 탈출과 배 옮겨타기는 그만하자. 자신과 무관한 듯 발뺌하는 친박 관계자 보다 그래도 조금은 더 나아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