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설교

(삶과 신앙의 의문을 찾아서) 2편: 어떻게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가?

양치는선비 2010. 7. 1. 16:09

34:1-6, 15

 송병주 목사(선한청지기교회)

 

들어가는 말

호레이쇼 게이츠 스패포드 (Horatio Gates Spafford) 는 시카고의 변호사로서 무디 장로교회의 장로였습니다. 성실히 살아가며 열심히 믿음으로 교회를 섬기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병약한 아내를 위하여 사랑하는 네 딸과 함께 프랑스 여객선 <빌 드 아브르> 호를 예약하고 가족 휴양을 갖기로 모든 계획을 마쳤습니다. 이처럼 그는 훌륭한 변호사, 교회의 장로님, 그리고 좋은 아버지였습니다. 하지만, 여행출발 전, 1873년 시카고의 대화재로 인하여 그의 집과 재산은 모두 불타 버렸고, 이 화재로 인해 그가 섬기던 무디 장로교회마저 불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당시 교회 재정담당이었던 스패포드는 불탄 교회를 다시 재건하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 아내와 네 딸만 휴양지로 먼저 보내고 자신은 가족여행에 나중에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네 딸들을 먼저 보내고 열심히 불탄 교회의 재건을 위해 수고하고 있던 중 그는 엄청난 사고 소식을 듣습니다. 뉴욕항을 떠나 대서양을 횡단하던 <아브르>호는 1873 1122일 새벽2시에 영국의 철갑선 <로키안>과 충돌하게 되었고, 226명의 승객들이 차가운 대서양 바다속에 잠기게 되었고, 40여명만 구조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절망과 마지막 희망이 교차하는 시간이었고, 10일이 지난 후 영국 웨일즈에서 날라온 아내의 전보를 받았습니다. “Saved Alone” 

우리의 삶 가운데 이런 고통이 있습니다. 죄를 짓고 악을 행하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최선을 다해 일하며 살았고, 열심을 다해 교회를 섬기며, 훌륭한 가장이었습니다. 더구나 시카고 대화재로 불탄 교회의 재건을 위해 불철주야 애쓰던 중에 사랑하는 네 딸을 한순간에 대서양 바다 깊은 곳으로 보내야 하는 절망 앞에서 우리는 이런 고통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의인이 당하는 고난, 믿음의 백성이 당하는 절망적인 상황이 우리의 삶 속에는 있습니다. “왜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가? 왜 하나님은 사람이 고통가운데 몸부림 치도록 두시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음주에 한번 더 말씀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믿음의 백성에게도 피할 수 없게 닥치는 절망과 고통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시편 34편을 통해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인 시편 34편을 봅니다. 언뜻 보면 특별한 내용이 없어 보일정도로 평범한 찬양의 시편입니다. 여호와를 송축한다는 말, 자랑한다, 광대하다는 표현은 특별하다기 보다는 평범한 찬양시입니다. 하지만, 이 속에는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아픔과 절망적인 고통이 담겨있습니다. 인간의 인격과 자아가 뿌리채 무너지는 것같은 절망이 이 시편의 배경속에 담겨있습니다. 첫머리에 시에 대한 소개가 나옵니다.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체 하다가 쫓겨나서 지은시라고 합니다. 살기 위해 미친체 했던 상황에서 과연 찬송시가 나올런지 모르겠습니다. 인격적으로 무너지는 상황, 밀려오는 자괴감으로 자아가 붕괴되는 듯한 상황에서 과연 찬송이 나올런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미치지 않고서야… 오히려 이런 상황이라면 찬송보다는 원망과 분노만 터질 상황일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런 자아붕괴의 밑바닥에서 찬양을 드렸습니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 곧 내가 나자신을 혐오할 것같은 상활을 겪고도 다윗의 찬송을 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어떻게 우리도 절망적인 상황을 이겨나갈 수 있을지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 의인에게도 자아가 붕괴될 것같은 절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의인에게도 자아가 붕괴돌 것 같은 절망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고통은 나쁜 사람, 연약한 사람, 문제있는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 의인도 동일하게 자아붕괴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의인도 절망과 낙망과 우울증과 정신분열증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안수집사이든, 권사이든, 장로이든, 목사이든, 선교사든 누구나 지치고 곤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6절과 17절은 똑같은 문장구조와 형식을 사용하는데, “곤고한 자”와 “의인”이 동격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절은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함으로 믿음의 백성에게도 피할 수 없는 절망과 고통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기스 왕앞에 미친 하다 쫓겨난 후 지었다는 이 찬송시의 배경이 되는 사건은 삼상 21:10-15사이에서 나옵니다. 그 부분을 읽어보면 얼마나 다윗의 자아가 붕괴될 만큼 힘들었을지 알 수 있습니다. 소위 말해서 “살기 위해 이 짓까지 해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만한 상황입니다. 

날에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일어나 도망하여 가드 아기스에게로 가니 아기스의 신하들이 아기스에게 고하되 이는 땅의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사람의 일을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한지라 다윗이 말을 마음에 두고 가드 아기스를 심히 두려워하여 그들의 앞에서 행동을 변하여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 아기스가 신하에게 이르되 너희도 보거니와 사람이 미치광이로다 어찌하여 그를 내게로 데려왔느냐 내게 미치광이가 부족하여서 너희가 자를 데려다가 앞에서 미친 짓을 하게 하느냐 자가 어찌 집에 들어오겠느냐 하니라

살기 위해 내가 이런 까지 하며 살아야 하는가?” 살기 위해서 손톱이 빠지도록 벽을 긁어대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사람의 체통이고 뭐고 침을 질질 흘리며 눈을 뒤집고 살기 위해 미친짓 마저 해야하는 그의 심정을 생각해 봅시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과거의 블레셋에까지 가서 살기 위해서 미친짓을 해야하는 심정.... 마치 한때 독립투사로 일본경찰을 죽이고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이 자신의 민족의 지도자에게 거부당하고 일본 경찰들 앞에서 서서 살기 위해 미친짓을 하며 몸부림 치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낳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아닐까요. 잘 못한 일이 있습니까? 그저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려 했을 뿐인데… 때로 이런 순간이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제가 설교 준비를 위해서 한번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거울 쳐다보고 해보았습니다. 흘리면서, 벽을 긁으며웨에에하고 소리를 질러보았습니다. 가관이더군요. 아무도 없는줄 알았는데 그 화장실에 사람이 한명 있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저를 보더 비명을 지르며 뛰어나가시더군요. 놀래서 따라 나가며 아무리 불러도 더 놀라서 뛰어 내려가 버리더군요. 얼마나 민망하던지요.

그런데 인간적으로 어떻게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입니까? 내가 살기 위해서 미친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이고 건지심입니까? 만약 저라면내가 살기 위해 미친 할때 당신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이스라엘의 왕이 되라고 기름 부으시고 짓하라고 부르신 것입니까?” 원망과 분노가 터졌을 것입니다. 더구나... 자리에는 다윗 혼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를 따르는 무리 일부도 함께 있었습니다. 부하들 앞에서 살기위해 미친 체하는 리더... 모습을 지켜보는 부하들... 가드 아기스 앞에서 쫓겨나와서 함께 ... 얼마나 서로 민망했을까요? 이런 민망한 자기 붕괴를 경험하는 일이 우리의 삶 가운데 늘 있습니다. 그렇게 설교가 좋았던 목사님, 평생을 기도로 승리할 줄 알았던 권사님, 그렇게 아름다운 찬양을 드리던 자매님도 처절한 자아 붕괴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을 겪고도 다윗이 이 자괴감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서 나올 수 있었을까요?

 

둘째. 그 절망의 비명을 부르짖음을 하나님은 기도로 여기십니다.

 이런 일을 겪고 나서 다윗이 무엇이라 고백하고 있습니까? 4절과 6절은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곤고한 자기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그런데 이 표현을 보고 고난을 이기는 것은 “간절한 기도와 부르짖음입니다.”라고 outline을 쓸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금방 사무엘상을 살펴보았지만, 미친체하며 난리쳤지 거기서 간절히 통성기도한적은 없습니다. 다윗이 그 자리에서 꿇어앉아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며 “나를 살려 주십시오. 기적을 주십시오.” 간절히 기도해서 아바멜렉과 그 부하들이 정신을 잃어서 유유히 다윗이 걸어 나왔다면 말이 될런지 모르겠지만, 전혀 그런 분위기는 전혀 아닙니다. 간절히 기도했기에 구원이 임했다기 보다 그저 살려고 몸부림치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은 살기위한 우리의 몸짓과 비명을 기도로 여기셨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4절과 6절은 뜨거운 통성기도 할때 응답하셨다는 말이 아니라 살기위해 지른 처절한 비명소리를 기도로 여기시며 하나님이 응답하셨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지르는 절망의 비명을 부르짖음의 간구로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한번 더 생각해 보면 그 처절한 절망과 비명을 지를때 다윗의 가슴속에 어떤 마음이 있었을까요? 그렇게 침흘리고 손톱이 빠져라 대문에 그적거리며 미친체할때 그의 가슴속에 하나님 제발살려주십시오.”하는 절규가 마음속에 흐르지 않았겠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입술의 언어를 들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가슴의 언어를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숨이 턱턱 넘어가듯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는 상황, 마치 사막 한가운데 목이 말라 숨넘어가듯 외치는 !”같은 외마디 비명속에 담긴 가슴의 언어를 우리 하나님은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았기에 미친체하고 살아나서도 내가 이 짓까지 하며 살아야 하는가?”는 회의감 보다 내 기도와 부르짖음에 응답하셨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 Two Job 뛰어가며, 늦은 밤 몸뚱아리 침대에 던지듯 쓰러지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한마디 기도하지 못하다고 해도, 그 처절한 살기 위한 몸부림과 눈물속에 담긴 처절한 가슴의 언어를 우리 주님은 분명코 들으시는줄 믿습니다. “내가 이렇게 까지 살아야 하는가?”하는 처절한 절망속에서도 여러분의 마음과 가슴에 담긴 눈물의 언어를 우리 주님 기도로 들으시는 줄 믿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다윗이 그 위기를 넘긴 것은 미친척 행동하는 탁월한 임기응변 능력 때문이 아니라 살기위해 몸부림 치는 모습을 간구로 여기시고 입술로 고백못한 가슴언어를 부르짖음으로 들으시는 하나님의 은혜 덕택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고 나서 빨간딱지 붙은 빈 아파트에서 몇개월을 여동생 둘 데리고 버티었던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피신을 가셨고, 고등학생인 제가 그 세파를 감당하기는 참 쉽지 않았습니다. 전기, 수도, 도시가스, 전화 다 끊어진 집에사는 것도 지옥이었지만, 빚을 대신 받으러 오는 깡패들을 상대하는 일은 참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혹시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살하신 것은 아닌지… 그 두려움은 마음을 늘 무겁게 했습니다.

몇개월이 지나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에 아버지 어머니가 집에 오셨습니다. 모처럼 만의 가족시간을 불꺼진 아파트에서 갖는데, 빚을 대신 받아주는 폭력배들이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나가시려는 아버지를 안방에 붙들고, “한 두번 겪은 일이 아니니 제가 해결하겠습니다.”하고 제가 나갔습니다. 부엌으로가서 손에 칼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문을 열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동생 둘 밖에 없는 집에 깡패들이 와서 행패를 부리니 경찰을 불러주세요.” 아파트 복도가 떠나가라 소리를 질렀지요. 그들도 고등학생이 눈에 불을 켜고 나와 휘두르니 뒤로 물러나서 겁도 주고 달래더군요. 그럴 수록 더욱 소리를 질렀습니다. 나중에 그러더군요. “네가 우리와 싸워서 이길 수 있을 것 같애?” 무슨 마음이었는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못 이기겠지. 그러나 하나는 내 손에 죽겠지. 누가 죽고 싶어?” 하도 소리를 질러대니 안 되겠다 싶었는지 두고보자며 가더군요.

집에 들어와 칼을 제자리에 두고 얼마나 눈물이 났는지 모릅니다. 아버지가 나와서 저를 붙들고 우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오늘 너희들 마지막으로 보고 죽으려했다. 그런데 네가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을 보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든다. 아들아 걱정하지 마라. 이 애비 꼭 다시 재기하여 돌아오마. 조금만 기다려다오.” 새벽이 되어 아버지가 나가시도록 도와드리고 혼자 새벽길을 거닐다 교회 생각이 났습니다. 밤새워 아이들이 선물교환하고 놀았을텐데, 선물 살 돈도 없었고 여동생들 때문에 가지 못했던 교회에 행사도 끝났을테니 가보고 싶더군요. 들어가서 모든 행사가 마치고 남은 친구들이 피아노 주변에서 찬양을 하고 있더군요. 밀려오는 원망과 상한 마음… 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온갖 힘든 마음으로 눈을 감고 있는데, 찬양 한곡이 마음을 파고 들어왔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주께 감사드리세. 날 위해 이 땅에 오신 독생자 예수. 내가 약할때 강함주고 가난할때 우리를 부요케하신 나의 주 감사” 얼마나 눈물이 났는지 모릅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내가 칼들고 소리질러 그들을 쫓아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몸부림을 보셨구나. 내 가슴속에 흐르던 “제발 하나님 살려주세요”했던 마음의 비명을 하나님이 기도로 들으셨구나. “이런 짓까지 하며 살아야 하나?” 생각이 들었지만, 오히려 나의 몸부림과 비명을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생각이 들자 감사의 마음이 밀려왔습니다. 그 몸부림덕택에 아버지가 삶의 의지를 가졌다는 생각을 하자, 그 끔찍했던 두려움의 순간에 대해 감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랬구나. 이렇게 까지 살아야 하나 싶은 그 몸부림과 절규를 하나님은 기도로 들으시는 분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온 세상을 향해 쩌렁쩌렁 울리는 천둥번개같은 소리치지 못하고 가슴속에 모기소리같은 탄식처럼 우리의 한숨속에 있는 기도까지 들으시는 분이십니다.

 

셋째. 그 부르짖음의 간구를 경외로 찬양으로 승화시키십시오. 

이것을 알았기에 다윗은 찬양하기로 결단했던 것입니다. 쉽게 보면 1-2절이 특별한 표현이 아닙니다. “내 평생에 하나님을 언제나 항상 찬양하겠다”는 고백이 그냥 보면 별 말이 아니지만, 다윗에게는 얼마나 처절한 아픔이후에 내린 결단에 찬 고백인지 발견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다윗은 이 상황에서 오늘 이 시편 34편을 노래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비명을 부르짖음의 간구로 승화시켰을 뿐 아니라 그것을 아름다운 찬송으로 승화시켰습니다. 그렇습니다. 고통과 절망을 이기는 힘은 바로 찬양의 힘입니다. 찬양은 기분나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찬양은 절망을 이기는 능력의 통로입니다. 비명을 부르짖음으로 그 부르짖음을 찬송으로 드려질때, 하늘이 움직일 줄 믿습니다. 가장 절망적인 순간, 자존심이 무너지고 자아 붕괴를 경험할때 우리는 2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원망과 한탄과 분노로 죽어갈 것인가 아니면 찬송과 영광과 믿음의 소망으로 생명을 누릴 것인가?” 소망하기는 “분노 34편”이 아니라 “시편 34편”의 주인공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성령께서 찬양의 사람들을 생각나게 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찬양하고 싶지 않을 형편과 상황 속에 있으면서도 한없이 주님을 바라보며 신뢰하며 찬양하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항암치료로 머리가 빠져가고 고통스럽게 지쳐가는 아내의 손을 잡고 와서 앉아, “전능하신 나의 하나님은...” 찬양을 불러 달라던 노 장로님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의사이면서도 한의사였던 그 장로님은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신의 경험과 능력이 아니라 아름다운 찬양으로 나가시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남편의 손을 잡고 나와서 어깨에 손을 얹고 찬양하는 모습, 자기 몸조차 운신하지 못하는 장애아를 가진 어미가 입을 틀어막고 오열로 찬양하는 모습, 병든 아내를 위해 새벽제단에 엎드려 기도하는 남편, 키모로 지치고 부숴질 것 같은 몸 상태인데도 힘겹게 주일 예배를 나오셔서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 중에 탄식처럼 부르는아버지... 사랑합니다.”하며 찬양하던 모습을 생각하게 하셨습니다.

그분들의 찬양을 떠올리고 있을때 하나님은 저에게 깊은 것을 알게 하시더군요. 모든 찬양을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전문적인 너희들이 만드는 웅장한 찬양 때문만이 아니라, 찬양조차 없는 상황에서 비명같은 찬양을 드리는 그들로 인해 내가 너희의 예배를 받으며, 너희 가운데 있다. 차마 고개를 돌릴 없는 그들의 노래로 인해 나는 아직 이땅을 사랑한다.” 것이었습니다. 때로 하나님은 구토해버리고 싶은 이 시대의 화려한 교회와 예배를 참으시는 것은 바로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비명같은 찬양을 드리는 사람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눈이 붉어지고 감동의 눈물이 흐르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화려한 성전을 만들고 최고의 시스템을 갖추어 웅장한 감동적인 예배를 드려서가 아니라 고통속에 찬양하는 당신의 백성들로 인해서라는 것입니다.

몸에 들어온 고통으로 인해 포기하고 죽어버릴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 있습니다. 번뇌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수행을 통해 사리가 생기는 삶이 아니라 고통과 번뇌를 끌어안는 찬양의 진주를 맺는 삶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가장 고통스러울 , 고통의 세상 한복판에서 찬양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탄식처럼 터지는 우리의 비명같은 찬양소리를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찬양은 형편과 기분에 합당하게 돌리는 영광이 아닙니다.” 오히려 찬양은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의 아내의 저주가 가슴에 닿는 것처럼 여겨지는 순간에도 하늘을 움직이는 진정한 찬양을 할 수 있습니다. 몸에 들어온 고통이 크고 깊을 수록 크고 가치있는 진주를 만들 ... 가장 깊고 아름다운 찬양은 진주와 같습니다. 그것이 승리의 길이며 열매입니다.

요즘 자폐 진단을 받은 저희 막내가 아주 좋아하는 찬양이 있습니다. “주가 보이신 생명의 주님과 함께, 상한 맘을 드리며 주님앞에 나아가리. 나의 의로움이 되신 이름 예수. 나의 길이 되신 이름 예수. 나의 오직 그가 아시나니 나를 단련하신 후에 내가 정금같이 나아오리다.” 악을 쓰듯 찬양을 부르는데, 운전하던 저와 아내는 눈물과 함께아멘으로 화답했습니다. 알겠습니까? 찬양을 사랑하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반드시 이루게 하실 믿습니다. 평생 찬양을 부르게 되고, 사랑하게 되고, 그래서 응답받게 되길 소망해봅니다. 그래서 기필코 승리하는 삶이 될줄 믿습니다.


맺으며

영국에 도착해 있는 아내를 데리러 가기위해 출발했던 스패포드는 자신의 네 딸을 잃은 사고지점을 지났습니다. 선장은 그에게 이곳이 사고가 난 곳이라고 알려주었고, 스패포드는 떨리는 무릎과 주체할 수 없는 아픔으로 피같은 눈물을 쏟으며 울었습니다. 견딜 수 없어 선실로 들어간 스패포드는 사랑하는 네명의 딸들을 향한 그리움과 하나님을 향한 원망으로 비명어린 기도를 드리며 밤을 새웠습니다. “하나님 왜 이렇게 하셨습니까?” 불타버린 집, 불타버린 교회, 그리고 잃어버린 네 딸아무도 설명할 수 없는 믿음의 백성이 당한 기가막힐 절망으로 고뇌의 밤을 보내었습니다.

이 아픔과 고뇌에도 불구하고, 깊은 밤을 밀어내고 떠오르는 태양빛이 선실안을 비춰올때 그의 마음속에는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 찬양으로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슴속에 밀려든 감동을 옮겨 적었고, 감사기도를 드렸을때 모든 절망과 분노가 떠나고 그의 마음에 치명적인 절망을 이기는 하늘의 평강이 그 마음에 임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찬송가 내 평생에 가는 길입니다. 불타버린 집, 불타버린 교회, 잃어버린 네명의 딸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은 가장 큰 평화를 향한 통로였고, 그 속에 울려퍼진 찬송은 고통을 이기는 힘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에 삼상 21:10-15절은 있지만, 시편 34편이 없는 인생이 많습니다. 미친체 하며 살아간 처절한 삶은 있는데, 미친체 하며 살아야 했던 현실속에서도 감사 찬양을 드리는 삶은 없습니다. 삼상 21:10-15 같은 우리의 삶의 현실이 있다할지라도 시편 34편의 삶을 살게 되시길 축복합니다. 우리의 삶에 시편 34편의 노래가 울려퍼진다면 우리는 승리한 하나님의 백성인줄 믿습니다. 가슴언어를 들으시는 주님으로인해 고통의 눈물을 찬양의 희락으로 승화시키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