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설교

십계명 서론 - 해방된 노예를 넘어

양치는선비 2014. 6. 14. 05:01
송병주 목사 (선한청지기교회) 


1. 십계명에 대한 거부감

십계명 시리즈를 한다고 하면 율법주의로 받아들이거나 빡빡하게 혼나는 이야기가 많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현대 미국같은 자유로운 사회에서 십계명을 이야기한다면 뭔가 얽어매는 부정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인다. 십계명을 배우라고 하면 뭔가 얽어매고 장악당하고 통제당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오죽하면 Man from Earth 라는 영화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I can sum up the ten commandments in ten words: Don't, don't, don't, don't, don't, don't, don't, don't, don't, don’t!" 돈돈돈돈돈 돈돈 돈돈돈 하면 된다는 식이다. 그런데 이것자체가 이미 틀렸다. 십계명을 읽어보지도 않고 쓴 대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4계명과 5계명은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했고, “네 부모를 공경하라” 했기 때문에 2번의 Do가 들어간다. 고로 “돈돈돈 두두 돈돈돈돈돈”해야 맞다. 어쨌든 십계명을 읽어보지도 않고도 부정적인 느낌을 갖는 것은 우리 시대의 현실이다.

왜 이런 거부감을 갖게 되었을까? 이것은 일반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많은 기독교인들도 십계명에 대해 매우 어정쩡한 입장을 갖고 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십계명에 대한 오해에서 시작되어진다. 십계명을 구원론과 성령론의 입장에서 보지 못하고, 우리와 상관없는 그저 고대인들의 시민법 혹은 관습법으로만 보기 때문에 필요없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신약이 ‘율법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것을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것으로 오해함으로 부정적인 입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수님도 분명히 밝히셨던 것처럼, 예수님은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라 왔다”는 입장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이 십계명을 어떻게 완성하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십계명에 대해 유대인들이 오해한 것을 예수님은 바로 잡고 완성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10계명을 대하면서 “첫째, 하나님의 원래 의도가 무엇인지, 둘째, 유대인들이 어떻게 오해했는지, 셋째 예수님은 어떻게 완성하셨는지” 알아가면 된다. 앞으로 그렇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렇다면 십계명에 대한 유대인과 예수님의 차이는 무엇인가?

2. 예수님과 유대인의 차이

유대인들은 항상 형식과 절차를 논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음과 법정신을 강조하셨다. 유대인들은 복잡하게 만들었으나 예수님은 단순하게 정리하셨다. 유대인들은 10개의 계명을 중심으로 수만개의 추가 규정을 만들었지만, 반대로 예수님은 10개의 계명도 2개로 줄이셨고, 잡히시기 전에는 아예 한 계명으로 줄이기까지 하셨다. ‘형식의 종교와 마음의 종교’ 그리고 ‘복잡한 계명과 단순한 계명’이란 차이가 유대인과 예수님 사이에 존재했다.

막 12:29-31을 보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요 13:34-35을 보자.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이는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것으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나의 제자인 줄 알리라.”

이게 “2개만 지켜라.” 아니 “하나만 지키면 된다”는 말일까? 아니다. 이것은 형식과 절차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심장, 가슴, 영혼이 담긴 ‘사랑’ 하나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쩌면 말이다. 이 하나를 지키는 것이 10개의 계명, 아니 수만개의 계명을 지키는 것 보다 더 어려울지 모른다. 실제로 역사적 이스라엘도 수천개, 수만개의 규정은 지켰어도 이 단 하나의 사랑을 드리는데 늘 실패하지 않았는가? 사랑이 없으면 복잡해진다. 하지만, 사랑이 있으면 단순하다.

필자는 성도들이 이번 과정을 통해 ‘규정이 아니라 사랑’이 가슴에 남게 되길 소망한다. 그래서 이번 십계명 시리즈를 통해 깊은 영성을 발견하게 되길 소망해 본다. 단언컨대 십계명 강해를 통해 십자가의 보혈의 피고 흐르고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넘치길 소망한다. 왜냐하면 다소 황당하게 들릴 수 도 있겠지만, 십계명은 구원론과 성령론으로 그 의미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십계명이 구원론과 성령론과 관련이 있는지 살펴 보도록 하자.

3.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오늘 본문의 1절을 보자.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3번에 걸쳐, 3가지 문법을 사용해서 곧 곧, 명사, 현재분사, 동사를 사용하여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spoke, these words, saying) 주신 것이 십계명이라고 밝히고 있다. 일반적으로 고대의 모든 법은 “왕 누구누가의 명령이다.”라는 방식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십계명은 함무라비 법전처럼 사람과 왕이 만든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임을 3번에 걸쳐 음운론적인 강조가 일어나고 있다. 먼저 강하고 싶은 것은 십계명은 도덕법의 진화에 의해 만들어진 인간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이 직접 계시하신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십계명을 종교의 진화, 도덕법의 진화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현대 신학자들은 십계명이 가진 고등성과 진보성 때문에 “이건 분명히 고대에 기록되었을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원시종교에서 고등종교로 진화하며 파생된 것이기에 후대에 점가 되었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말 그대로 그런 시대에 이런 진화된 법이 존재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위 ‘고대 저작설’을 거부하고 ‘후대 첨가설’을 주장한다.

하지만, 필자는 역으로 이처럼 고대시대에 진보적이고 수준높은 법이 존재했다는 것자체가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계시라는 분명한 증거가 아니겠는가?”라고 말하고 싶다. 하나님의 계시니까 당연히 고등성과 진보성을 갖고 있다고 하면 될 일인데, 자꾸 원시종교가 고등종교로 진화되었다고 설명하려고 드니까 이렇게 고등하고 진보적인 법은 당연히 후대에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논리가 나오는 것이다.

 

4. 계시이기에 왕도 법 아래에 있어야 했다.

하나님이 계시하셨다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은 당대의 일반적인 법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는 점이다. 지금이야 국민의 대표가 법을 만들지만, 고대의 법은 왕이 만들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함무라비 법전도 당연히 왕이 만든 법이다. 그러므로 법을 만든 의도는 백성을 통제하고 억압하면서 왕과 권력자의 통치를 쉽게 하기 위해 법을 만들었지, 백성을 보호하고 지켜주기 위해서 만든 법들이 아니었다. 따라서 결과적으로 왕은 항상 초법적 존재였고, 지도자들은 법 위에 존재했다. 법의 창조자로서 법을 지키기 보다는 만들고 고치며 집행하는 존재였다.

그런데, 십계명은 하나님이 직접 계시하심으로 인해 왕들조차 법 아래에 존재해야 했다. 십계명 때문에 왕들은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없었다. 이웃의 아내를 탐할 수 도 없었고, 살인해서도 안되었던 것이다. 자기가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이요” 해버리면 왕도 감히 어찌하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실제 구약의 역사를 봐도 어떤가? 감히 선지자들이 나와서 왕에게 회개하라고 소리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윗이 밧새바를 범했을 때에도 선지자는 이 일로 인해 왕이 벌을 받을 것이라고 선포했다. 아합과 이세벨도 왕궁 앞에 있는 나봇의 포도원 하나 빼앗지 못해서 위증과 살인교사를 하다가 결국 선지자에게 “개들이 네 피를 핥으리라”는 예언앞에 서야했다. 사울왕도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이 당신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습니다. 다른 왕을 세우실 것입니다.”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것도 하나님이 만드신 법 아래에 왕이 있었기 때문이다. 왕에게 법을 들고와서 ”하야하십시오” 하던 일이 고대 왕국시대에 가능했다. 이런 것은 지금도 쉽지 않은 일이다.

십계명이 BC 1400년도에 만들어졌으니 놀라운 일이다. 종교개혁 시대에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Samuel Rutherford 가 <Lex, Rex> 곧 영어로는 The Law is King (법이 왕이다)이라는 책을 출판했다. 그때 그는 이 책을 통해 왕도 법 아래에 있어야 한다. 그래서 Bloody Mary 여왕이 법을 어기면 하야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왕권으로부터 교회가 독립을 시작한 것이 AD 1664년이라고 한다면, 구약의 법정신은 3천년을 앞서간 것이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정도전이 AD 1394년에 <경국대전>을 지으면서 왕도 법 아래에 있다는 것을 확고히 한 것을 본다. 그래서 한국 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장면이 “전하~ 아니 되옵니다.” 였다. 항상 왕의 궁궐 앞에는 연좌농성하고 법을 지키라는 요구사항이 전달되던 시대였다. 이런 개념이 도입된 것이 조선시대였는데, 구약시대 BC 1400년대에 이런 법이 존재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현대 신학자들이 이것이 고대에 존재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중의 하나이다.

지금도 법 위에 군림하려는 지도자들이 넘치는 세상을 본다. 그렇다면 AD 2014년 사는 우리가 이렇게 어려운데 BC 1400년대에 이런 일이 가능했다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건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워진 십계명은 시골에서 뽕나무 키우다가 온 촌 사람이라 할지라도 선지자라면 감히 왕에게 회개와 심판을 선언할 수 있게 했던 근거가 되었던 것이다. 왜일까? 왕이 만든 법이 아니었고,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다. 왕도 피해갈 수 없는 법…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5. 노예였음을 잊지 말라.

이렇게하신 말씀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2절에서 “너희가 노예였음을 잊지 말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네가 법을 집행하는 관료든지, 왕이든지… 너희 모두는 애굽의 노예 출신이었다는 것이다. 애굽의 왕이 만든 무서운 법 때문에 죽을 고생을 했던 “히브리” 계급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말이다. 참고로 히브리는 단어는 사회적 밑바닥 인생들을 지칭하는 보통명사였다. 하지만, 출애굽 이후 이스라엘 민족을 의미하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그렇기에 사회적 약자로서 경험했던 고통과 아픔을 기억하고, 다른 사회적 약자가 고통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게 위해서 법이 만들어진 것이다.

“애굽왕 바로가 만든 무서운 법 때문에 하루도 쉬지 못하고 허리가 부러져라 국고성을 쌓느라 살지 않았느냐? 너희들이 얼마나 무서운 채찍질을 당하지 않았느냐? 노예로 살면서 얼마나 부당한 대우를 받았느냐? 그 때문에 아들이 태어나면 나일강의 악어밥으로 다 던져 주어야 하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너희가 그런 꼴을 당해놓고, 자유인이 되어서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도전이 깔린 것이 십계명의 출발점이었다.

즉, “너희가 하루도 못쉬고 일했으면서 너희가 하루도 못쉬고 일하게 하면 안된다. 너희가 아들 죽는 아픔을 알면서 남의 자식 죽이는 일을 하면 안된다. 너희가 채찍질 당해놓고 부당한 채찍질을 하면 안된다. 너희가 노예생활 해놓고 같은 동족을 노예로 삼으면 안된다.”는 것이 십계명인 것이다. 너희가 고통을 알면서 남들을 고통속으로 밀어넣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희년을 만들어 노예를 7년마다 해방시키는 법을 만들게 한 것도 그런 연유이다. 이런 황당한 법이 BC 1400년 경에 만들어진 것이다.

나올 때에는 똑같은 노예였는데, 이제 자유가 생기면 역시 이스라엘 안에도 지배와 피지배의 구조가 생기는 상황이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래서 왕들이 애굽의 바로 흉내를 내고, 백성의 두령들이 애굽의 채찍질 흉내낼 것을 미리 막자는 것이었다. 십계명은 개구리에게 올챙이 시절을 잊지 말도록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원래 군대에서 고문관들이 나중에 가장 무서운 고참이 되고, 험한 시집살이 한 며느리가 무서운 시어머니 되는 것과 같은 이유로 십계명은 노예였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먼저 기억하도록 그 법정신의 전제를 깔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꾸 십계명의 서두인 2절에서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이라는 표현을 강조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네가 아무리 왕이되고, 선지자가 되고, 대제사장이 되고, 백성들의 방백과 두령이 되었다고 해도, 너희가 이 십계명 앞에 설때마다 너희는 종놈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라. 함부로 다스릴려고 들지 말고, 네가 누구든 간에 먼저 말씀 앞에 순종해라는 도전이다.
십계명은 우리에게 도전한다. 네가 다스리려 하지 말고, 왕이든 제사장이든 아버지든 리더든… 먼저 하나님의 명령앞에 순종해라는 도전이다. 너희가 왕이 되었다고 노예였다는 것이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너희가 선민이 되었다고 해서 노예였던 과거를 잊고 교만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법은 ‘남용할 권력’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주어진 권력’이다. 권력은 잘 사용해야지 남용해선 안된다.

선택 받은 백성이라고 교만하지 말라는 도전이 깔려 있다. 그건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목사가 되고,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직분자가 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는 도전이 담긴 것이다. 의롭고 선해서 선택 받은 민족이 된 것이 아니라, 죄인이고 소망 없는 노예인 우리를 자녀삼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계명은 은혜이다. 의로워 지기 위해 법을 지키지 말고, 해방된 노예로 용서받은 죄인임을 알고 겸손과 감사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의인이 되는 수단이 아니라 죄인임을 잊지 않는 것에서 십계명은 시작되어야 한다.

6. 십계명의 첫 말씀

그러면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신’ 첫 표현이 무엇인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그것은 바로 1계명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2절,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의 자기 소개로 시작한다. 이 말씀을 누가 하는지 모르는 이가 어디있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이 하신 일과 자기 소개부터 하면서 계명을 시작하신다.
개신교는 1계명을 3절부터 생각하고 2절은 서언이라고 생각하는데, 유대인들은 십계명의 1계명을 2절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우리가 나누어놓은 1, 2계명을 하나로 묶어서 2계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똑같다. 누가 더 맞다 이런 논쟁 보다 서언을 1계명으로 보는 유대인들의 의도에 긍정적인 측면은 참조할 만하다.

무슨 말인가? 법을 지키기 전에 우리가 노예였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 형성’이 우선이다는 점이다. 1인칭 단수, 2인칭 단수라고 할 수 있는 관계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십계명을 배우기 전에, 명령을 배우기 전에, 법을 배우기 전에, 하나님과 너와 나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고 법부터 지키려고 들지 말라는 도전이 담겨 있다. 하나님은 우리가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 되기 전에, 내가 누구인지 알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지 알며, 하나님과 먼저 ‘나와 그대’ 곧 ‘우리’의 관계부터 형성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I and You (나와 그대 곧 우리)의 관계가 아니라, I and It (나와 그것)의 관계로 세워져 있다. 공동체적 인격적 관계를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화 된 관계로 존재하는 경우를 본다. 십계명은 우리가 먼저 부부관계와 같은 인격적인 관계를 우선으로 출발한다.  십계명을 배우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과 나와 관계가 객관적인 ‘나와 그것’(I and It)의 관계인지, 아니면 주관적인 ‘나와 그대’(I and You)의 관계인지 질문해야 한다.

내가 죄인이었고, 노예였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 나와 그대의 관계가 형성되기 전에 법부터 지키려 들지 말라는 것이다. 노예인지 모르고 관계도 없이 법부터 지키는 사람들이 위험하고 무서운 사람들이 된다. 그럴때 법은 폭력이 된다. 기억하자. 십계명은 ‘명령’을 가르치기 전에 ‘관계’를 가르쳤다. 관계성을 상실한 법은 폭력이다.

7.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이걸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생각하는데 가요의 노래 가사가 자꾸 생각이 났다.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 우리는 십계명을 “난 네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야만 해”라고 여겨왔다. 이 둘은 완전히 다르다. 십계명은 “난 네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야만 해”가 아니라,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의 마음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을 우리에게 먼저 도전하고 있다.

옛날 어떤 여성이 있었는데, 한 남편과 결혼했다. 그 남편은 아침에 출근할 때마다 To do list를 주고 가신 분이었다. “창틀 먼지 제거, 싱크대 아래 물 때 제거” 등 목록을 주고 출근했다. 퇴근 시간에 돌아오면 하얀 장갑을 끼고 목록별로 점검을 하였다. 그래서 남편 퇴근 시간만 되면 불안과 두려움에 가슴에 울렁증이 생겼다.

그런데 하나님 은혜로 그 남편이 일찍 돌아가셨다. 새롭게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이 남편은 너무 사랑이 넘치는 남편이었다. 아침마다 키스하고 출근하며 “난 그대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말만 한다. 퇴근하고 돌아오면 오늘 하루 힘들었을 거라며 발 맛사지도 해주고 어깨도 주물러 준다. 이 여성은 너무 행복했다. 그래서 남편 퇴근 시간만 다가오면 집안 청소를 하고 정리 정돈을 시작했다. 남편을 만날 생각을 하니 보고 싶어서 가슴에 울렁증이 왔다. 과거에는 불안과 두려움의 울렁증인데 이제는 사랑과 기쁨의 울렁증이었다. 그래서 열심히 정리 정돈하기 시작했고, 나중에 그것도 모자라서 실내 인테리어를 하는 단계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집안을 새롭게 단장하다가 책장에 먼지 싸운 바인더를 발견하게 되었다. 보니 옛 남편이 매일 마다 주었던 To Do List 바인더 였다. 그 바인더를 뒤져 보던 여인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때는 그렇게 하기 싫었던 일들을 지금은 즐겁게 모두 다 하고 있는 자신을 본 것이다. 아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실내 인테리어까지… (지어낸 이야기지만, 참 잘 만든것 같다.)

이게 결국 무슨 말인가? “난 네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야만 해”에서 “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로 바뀐 것이다. 계명 보다 중요한 것은 관계이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니” 바로 계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관계인 것이다. 놀랍지 않은가? 노예같은 우리를 하나님은 그대로 여겨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니라 We 우리라는 관계를 만들어내는 동급의 대등으로 세운 것이다. 이 은혜, 이 관계가 먼저 세워져야 한다. 그것이 십계명의 출발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고 전제하길 바란다.

8. 십계명은 출애굽 이전이냐 이후냐?

그리고 우리가 질문해야 할 것이 있다. “십계명을 출애굽 전에 받았느냐? 출애굽 이후에 받았느냐?” 다른 말로 바꾸면, “구원받기 전에 받은 계명이냐? 구원받고 난 이후에 받은 계명이냐?”이다. 오늘 우리가 2절을 통해 주목해야 할 것은 십계명은 출애굽 이후, 구원받고 난 다음에 받았다는 점이다. 오늘 본문을 봐도 그렇고 십계명은 구원을 받기 위한 선행조건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2절을 보자.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에서 ‘인도하여 낸’은 완료형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인도하여 낼’이 아니라 ‘인도하여 낸’ 곧 완료형이라는 말이다. 즉, 구원 받기 위한 ‘선행 조건’으로서 십계명이 존재한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 십계명이 주어진 것이다. 십계명은 구원받는 조건이 아니라 구원 그 이후의 열매라는 것이다. 십계명을 잘 지키면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라면 십계명을 잘 지키게 된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의 실패는 십계명을 잘 지켜야 구원 받을 것처럼 생각했다. 십계명은 구원 받기 전에 우리가 지키기로 서명한 계약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백성에게 당신이 누릴 멤버의 권리와 의무를 말한 것이다.

9. 십계명과 오순절

더구나 십계명을 받은 날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절기와 연관성이 있다. 출애굽은 유월절로 시작되었고, 출애굽은 오순절에 확정되었다. 10번째 재앙 때 유월절이 있고, 출애굽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49일 뒤 오순절에 완전한 해방을 확신하고 축제를 벌였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7이란 숫자를 완전한 숫자로 이해했다. 그래서 홍해 바다를 건넌 후 7주를 벗어나면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사실, 유월절 이후 출애굽을 했지만 언제 이집트 군대가 따라올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7주를 빠져나가도 애굽이 따라오지 않으면 완전한 탈출로 확정되었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므로 7주를 빠져나간 후 즉 49일 후에 그들은 완전히 해방되었음을 기뻐하는 자신들의 잔치를 벌인 것이다. 그날이 바로 오순절이다.

유월절에는 우리가 한 일이 없다. 그냥 대속적 죽음과 피흘림으로 인해 죽음의 권세를 피한 날이다. 내 확신과 결단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 밖에서 일어난 대속적 죽음이 우리를 살린 날이다. 그런데 오순절은 완전히 허리 띠 풀고 화목제를 드리며 우리끼리 바베큐 파티한 날이다. 그래서 유월절은 속죄제사를 드리는 날로서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날이고, 오순절은 화목제로서 우리가 잔치를 벌이며 고기를 먹는 날인 것이다. 내가 기뻐하고 확신하고 즐거워하는 날이다.

그게 어디 나올까? 오순절 잔치를 벌이는 내용은 바로 오늘 10계명이 쓰여진 출애굽기 20장 바로 앞인 19장1절부터 시작된다. 결국 무슨 말인가? 십계명은 언제 받았다는 말인가? 바로 오순절때 받았다는 이야기이다. 유월절에 어린양이 대신 죽어 피흘렸고, 오순절에 십계명을 받았다. 결국 이것은 신약 시대에 그대로 재현된다. 예수님이 유월절에 십자가에 죽으셨고, 오순절에 성령으로 세레를 받았다. 결국 무슨 말인가? 유월절에 어린 양의 대속적 죽음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오순절에 성령충만한 것과 십계명을 받은 것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월절은 내가 확신하고 결단하고 해야 할 일이 없다. 그저 어린양의 대속적 죽음앞에 아무것도 할 일없는 죄인이고 노예일 뿐이다. 말 그대로 나의 주관적인 고백이나 확신 이런 것은 의미가 없고, 내 밖에서 일어는 객관적인 구원의 날이다. 하지만, 오순절날은 49일이 지나서 내가 확신하고 기뻐하며 나의 해방을 누리고 즐거워하는 잔치를 벌이는 날이다. 주관적으로 구원의 감격과 풍성함을 누리는 날이다.

예수님이 돌아가실 때 무능했던 제자들이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완전히 달라진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어떠했는가? 다 두려워하고 도망갔던 사람들이었다. 예수님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계집종 앞에서 두려워 떨던 비겁한 겁쟁이 베드로가 오순절 이후 성전에 서서 복음을 증거하는 선지자처럼 되더라는 것이다. 학문없는 범인으로 어부 출신인줄 알았던 촌 사람 베드로가 산헤드린 공회를 당황케 하는 권능의 사도가 되지 않았는가?

바로 십계명도 성령의 역사와 같은 목적과 의도로 오셨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 알아야 한다. 십계명은 구약의 성령세레와 같다고 말할 수 있겠다. 갈릴리 출신의 겁쟁이 배신자 어부들이 사도가 되었던 것처럼, 애굽의 노예였던 시대의 밑바닥 인생들이 모든 민족과 열방을 회복하는 열국의 제사장 나라로 세워지는 선민이 되게하는 일이었다. 신탁을 받은 해방된 노예들… 이것은 결국 해방된 노예를 넘어, 위대한 제사장이 되게하는 영광스러운 하늘의 축복이었다. 결국 십계명은 십자가의 보혈의 은혜와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같이 흐르는 은혜이다.

너무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유월절 신앙은 있는데, 오순절의 확신이 없다는 점이다. 이건 교단으로 순복음 운동을 하자 이런 말이 아니다. 말씀에 나타난 오순절 역사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의 사자는 피해갔는데, 생명의 감격을 누리지 못한다. 나 하나 구원받은 것은 있지만, 구원의 감격을 타인에게 전하지 못한다. 노예에서 해방은 되었지만, 열국의 제사장은 되지 못한 것이다. 감옥에서 나왔으나 자유인으로 살지 못한다. 오순절의 십계명, 오순절의 성령충만이 없으면 우리는 여전히 해방된 노예일 뿐 열국의 제사장 나라는 아니다. 해방된 노예로 만족하지 말고, 왕같은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충만 하지 않은 기독교인이 무의미 하듯, 십계명 없는 성도도 무의미한 것이다. 어린양의 대속적 피흘림은 있는데, 십계명의 삶과 성령충만이 없는 성도들이 많다. 유월절 구원론에 멈춰있지 말고 오순절 구원론을 누리라. 기독론적 구원론에 멈춰있지 말고 성령론적 구원론을 누리라. 십계명은 traffic school 에서 certification을 받기 위해 들어야할 교통법규가 아니라, 아름다운 1번 해안 국도를 얼마나 기쁘고 신나게 drive할 수 있는지 가르쳐주는 여행가이드와 같다. 그것이 십계명을 굴레가 아니라 은혜라고 말하는 이유이다.

10. 노예임을 잊지 말되 해방된 노예를 넘어서

말씀을 마무리 하겠다. 십계명은 ‘명령 준수’ 보다 ‘관계 형성’을 우선으로 했다. 십계명은 법을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사랑을 배우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형식의 종교라기 보다 마음의 종교를 강조한 것이었다. 이 기본 전제가 선행되어야 한다.

고대의 많은 법은 왕을 위한 법이었다. 하지만, 십계명은 백성의 보호를 위한 법이었다. 강자를 위한 법이 아니라 약자를 위한 법이었다. 그리고 백성을 법의 노예로 만드는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 곧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게 하는 법이었다. 즉, 노예에게 준 법이 아니라 왕의 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을 우리는 전제해야 한다.

그래서 십계명은 우리에게 이런 역설을 던져준다. “소망없는 노예였음을 잊지 말되, 해방된 노예의 한계를 뛰어 넘으라!” 십계명은 우리를 종으로 만드는 굴레가 아니라, 종에서 자유케 하여 왕같은 제사장으로 살게 하는 능력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애굽의 종이었던 것을 잊지 않되, 열국의 제사장 나라로 사는 길을 가르쳐준 것이었다. ‘해방된 노예’라는 것에 만족하지 말되, 이제는 죄에 노예된 백성들을 해방시키는 ‘노예 해방자’가 되도록 한 것이 십계명을 준 이유였다.

오순절에 새겨진 말씀으로 주어진 십계명… 그래서 십계명은 기름부으심이 가득하다. 그리고 우리를 해방된 노예를 넘어 왕같은 제사장으로 세우신다. 십계명을 통해 그 자유를 선포하게 되길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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