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설교

출 20장3절 / 십계명 제1계명 - 다른 신들이 문제가 아니라 내 욕망이 문제입니다.

양치는선비 2014. 6. 21. 11:32


1. 문제 제기

1계명은 영적 정체성을 분명히 하라는 도전으로서 매우 중요하지만, 동시에 많은 오해된 해석이 존재하기도 한다. 필자는 이 오해를 바로 잡는 문제 제기를 통해 바로 잡으면서 오늘 본문의 의도를 찾아가고자 한다. 

기독교인들 안에 1계명에 대한 오해가 있다. 바로 1계명과 2계명은 타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종교적 배타성을 강조한다는 오해이다. 그래서 비기독교인들은 “내가 이 배타성 때문에 기독교가 싫다”고 말하기도 한다. 실제 많은 기독교인들은 1계명을 근거로 기독교에 대한 충성심이 타 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태도로 증명된다고 생각한다. 다른 종교 시설물을 훼손하는 일이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가 타종교를 향해 전투적인 삶을 사는 것이 1계명을 잘 지키는 삶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타 종교시설에 들어가 십자가를 페인트칠 하고, 무너지라고 돌면서 땅 밟기 기도를 하는 등의 행위는 영성이 뛰어난 것이 아니라 파괴적 영성이며 사회성 결여이다. 석가 탄신일에 절을 향해 메가폰으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는 행위는 무례한 광신일 뿐이다. 그것은 영적전쟁이 아니라 종교분쟁이며, 그것은 전사가 아니라 깡패짓이다. 은근히 이런 분위기를 부추기는 교회 지도자들은 자중해야 한다. 소위 성전(Holy Warfare)이 벌어질 때마다 우리가 떠올리는 본문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과연 이 1계명이 궁극적으로 종교적 배타성만을 드러내는 본문일까?

많은 기독교인들이 내가 타종교를 믿지 않고, 타종교에 대해 전투적인 태도를 취하면, 나는 1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그런 논리라면, 교회만 다니면 되고, 그러면 1계명을 지키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솔직히 말해서 1계명이 다른 것보다 제일 쉬울 수 있다. 실재로 어떤 분이 그랬다. “딴 계명은 좀 어려운데 가장 중요한 1, 2 계명이 지키기 제일 쉽다. 하나님 믿고, 교회 다니며 신앙생활만 잘하면 된다. 가장 중요한 계명이지만, 한편으로 가장 지키기 쉽다. 은혜라고 생각한다.” 이것에 대하 “아멘”하면 절대 안된다. 완전히 오해했다는 뜻이다.

1, 2 계명은 비기독교인들이 어기는 계명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 잘 다니는 기독교인들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다른 종교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가진 기독교인들도 오히려 쉽게 어길 수 있는 계명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이제부터 살펴보겠다. 필자는 “하나님은 이 계명을 통해 단순히 ‘타종교에 대한 종교적 배타성’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안에 내재한 욕망에 대한 배타성’을 보여주신 것이다” 고 생각한다. 출 20: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내게 있게 말지니라’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이 본질적으로 무엇을 기대하셔서 이 1계명을 주셨는지 그 의미를 3가지로 살펴 보도록 하겠다.

2. 첫째의미. 영적노예를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는 뜻이다. 

먼저, 1계명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우상들의 영적 노예’를 벗어나 ‘하나님의 영적 자녀’가 되게 하기 위해 주어졌다. 출애굽기를 항상 대할 때 기억할 것은 이집트에서 430년을 노예생활 하며 하나님을 잊어 버렸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점이다.


무슨 말이냐면, 이스라엘이 애굽의 고통을 받는 ‘육체적 노예였다’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몸뚱아리만 노예로 살았던 것이 아니라, 애굽인들은 그들을 영적으로 정신적으로도 노예로 살았다는 점이다. 즉, 몸만 노예로 만들면 순종하지 않는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난도질을 해 버려야,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절망해버려야 노예로 살게 된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몸만 노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예배가 완전히 중단되어 버릴 정도로 영적으로도 노예 상태였다.

마치 일본 제국주의 시대때 일본인들은 우리가 그저 몸 뚱아리만 식민지 백성이도록 하지 않았다. 그들은 창씨개명을 시키고, 한국어와 한국역사를 배우지 못하게 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아예 식민지 사관으로 스스로를 열등민족으로 여기게 만들었고, 일본 국조대신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신사에 참배하며 신도를 믿도록 요구했다. 불과 40년 동안 그렇게 민족의 정신을 말살시켜 버렸는데, 430년 동안 애굽의 노예로 살았다면 얼마나 이스라엘이 영적으로 난도질 당했을런지는 미루어 짐작이 된다. 이스라엘의 심각한 문제는 그들이 ‘육체적인 노예로부터 해방’보다 ‘영적인 노예로부터 해방’이었다. 

현실적으로도 그들이 출애굽 이후 가나안 정착 생활을 시작하게 되면, 또 이집트와 똑같은 많은 가나안의 신들을 만나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므로 영적 노예 상태로부터 해방이 되지 못하면, 옛 이집트의 우상숭배와 같이 돌아설 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마치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듯이 옛 생활로 돌아갈 것은 자명한 노릇이었다. 애굽의 신들의 노예로 있다가 겨우 해방시켜 주었더니, 이제는 가나안 신들의 노예가 될 판이었다. 육체로는 자유인이 되었으나 영적으로는 여전히 노예로 사는 인생이 되는 모순적 상황이 될 판이었다. 그래서 육체적 노예는 해방되었지만, 그들의 영적 노예 근성을 바로 잡고 해방시키는 일은 더 중요한 다음 과제였다.

문제는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실제로 구약의 역사는 어떤가? 애굽의 노예로부터 해방되는 일은 430년 노예였더라도 1년만으로도 되었다. 하지만 애국의 영적 노예로부터 해방되는 일은 나중에 이스라엘이 망할 때까지 완결되지 못했다. 슬프게도 애굽의 신들이 단지 가나안의 신들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이런 현상은 신약 초대 교회에도 마찬가지였다. 복음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에 갖혀 있는 초대교회 교인들, 복음의 은혜로 해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영지주의와 로마적 가치에 황제숭배와 로마 신들의 영적 노예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초대교인들을 본다. 몸과 신분은 선택받은 백성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영적 노예의 습성과 관성을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이것이 그들만의 이야기일까? 안타까운 것은 지금 기독교, 교회 안에서도 이런 모습은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여전히 세상 가치관과 욕망에 사로잡혀 사는 것은 지금도 똑같은 우리의 민낯이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점을 치러 다닌다. 아침에 QT하고 신문의 오늘의 운수를 정독하는 것과 같다. 신년 특별새벽기도회 마치고 새해 토정비결 받으러 간다. 예전에 한국에서 있었던 대화인데 소개하겠다.

“집사님 어제 아이들과 수영장 간다고 하셨는데, 잘 다녀오셨나요?”
“아~ 예. 이번에 못갔습니다. 물을 피해야 된다 싶어서요.”
“건강이 안 좋으셨나봐요? 아프신데는 없구요?”
“건강은 괜찮습니다. 사실 아침의 신문을 보는데, 오늘의 운세에 물을 멀리하라고 해서…”

이 정도는 애교다 싶다. 타주의 부흥회 가서 요청을 받아서 개인기도를 해주자, 한 분이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정말 감사해요. 그리고 너무 놀랐어요. 목사님이 예언기도 해주신 것과 얼마전에 받은 사주와 똑 같네요. 오~ 정말 용하세요” 나보고 “용~ 하시네요” 하는 그 말이 내 귀에는 완전히 사단이 “용용 죽겠지?”하고 놀리는 말처럼 들렸다.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나 여전히 영적인 노예로 산다. 여전히 세상 신들에게 사로잡혀 살고 있다. 이것이 이런 미신 문제만이 아니다. 겉으로 기독교인이지만, 속은 돈의 자녀이다. 음란의 자녀이다. 중독의 자녀이다.  분노의 자녀이다. 욕망의 자녀이다. 그러므로 겉 사람이 기독교인이냐가 아니라 속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인지 봐야한다.

정리하자면, 1계명은 우리 몸뚱아리 해방시킨 것으로 만족하시지 않고, 우리 영혼의 완전한 자유와 해방을 원하신 하나님의 격려가 담겨 있는 것이다. 몸만 자유인이 아니라 영혼까지 자유인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결과론적으로 종교적 배타성의 이슈가 나오게 되는 것은 논리적 귀결이지만, 궁극적인 의도는 종교적 배타성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말이다.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 해방이 되었으면, 이제 일본 신사에 가서 참배하는 일은 그만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신사를 부수고 불태워 버리라는 말이다. 일본 식민지 역사관을 벗어나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모노 입지 말고, 게다신지 말고, 스쯔기 바지 그만 입고, 엔가 그만 불러라 이 말인 것이다. “노예시절 하늘이라고 여겼던 것들은 다 갖다 버리고 진정한 하늘을 섬기라”는 영혼의 자유를 선포한 계명이었다. “진정한 자유인이 되려면, 진정한 하늘을 섬겨야 하고, 이를 위해서 노예시절 하늘인줄 알았던 가짜는 버리라”는 말이다.

이건 격에 안맞게 피조물에 불과한 가짜신들과 싸우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진정한 자녀의 권세와 자유를 맛 보기를 원하신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었던 것이다. 몸 뚱아리에 해방을 주신 하나님이 영혼의 해방도 주려고 주신 계명이었다.

3. 둘째의미. 종교적 배타성이 아니라 이기심을 향한 배타성을 의미한다.

<유일신론과 단일신론의 긴장>

이제 두번째로 1계명이 주어진 이유는 종교적 배타성이 아니라, 내 속의 이기심과 욕망 그리고 자기사랑을 향한 배타성을 가지라는 것이다. 아니 지금 이 말은 분명히 종교적인 이야기인데 어떻게 인간의 내면의 문제가 될 수 있느냐는 의구심이 생길 것이다. 이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오늘 본문의 ‘다른 신들’은 실재하는 존재인지, 아니면 만들어진 신에 불과한 것인지 알 필요가 있다.

3절, “너는 나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에서 우리를 어렵게 하는 것이 “다른 신들”이다. 언뜻 보면, 1계명은 많고 많은 신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하나님만 섬긴다는 뉘앙스가 나타난다. 만약 많은 신들이 실재하고, 그 중에 하나님만 선택하여 섬긴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유일신론(monotheism)이 아니라 단일신론(henotheism) 이다.

만약 다른 신들이 실제하고 있는데 나머지를 버리고 하나님만 선택하라는 단일신론적 계명이라면 종교적 배타성이 맞다. 하지만, 다른 신들이라고 하는 것이 실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와 욕망 때문에 피조된 신, 만들어 진 신들이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면 다른 신들을 배제하라는 말은 종교적 배타성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에 대한 배타성이 될 것이다.

정의를 하자면, 유일신론은 세상에 다른 신은 없고 신은 여호와 하나님 한분 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른 것은 신들처럼 신격화된 존재이지 실제하지 않는 피조된 것이라는 인식이다. 반면, 단일신론은 다신론(polytheism)적인 배경 곧 많은 신들중에 최고의 신인 하나의 신만 선택해서 섬긴다는 말이다. 분명코 기독교 신앙의 성경적 원리는 단일신론이 아니라 유일신론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기독교인이면서도 단일신론적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1계명을 신들간의 경쟁체제와 투쟁으로 인식한다. 이것은 잘못된 개념이다.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섬기는 것이지, 다른 신들고 전쟁을 벌여 짓밟아 왕 자리로 등극하는 ‘최고의 신’이기에 섬기는 개념이 아니다. 하나님을 자꾸 ‘최고 신’으로 만들어 드리려고 하지 말라. 하나님은 최고신이 되려고 올림픽 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그냥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다.

<Creator 와 Created의 긴장>

다른 성경적 근거를 살펴봐도 마찬가지다. 구약을 봐도 “나는 처음이요 나는 마지막이라 나외에 다른 신이 없느니라..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다른 신이 있음을 내가 알지 못하노라”(사44:6~8) 다른 신을 ‘믿지 말라’가 아니라 다른 신들은 ‘없느니라’고 한다. 그리고 신약을 봐도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분밖에 없는 줄을 아노라”(고전8:4) 바울의 말처럼 우리가 나무를 깍아 만들고, 돌을 조각해서 만든 것들인데, 어찌 우리의 주관자가 되겠느냐는 것이다.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옮겨주지 않으면 가지도 못하는 것을 어떻게 섬기겠느냐는 말이다.

성경의 원리는 단순하다. 신들은 실재가 아니라 피조물에 불과한 아무것도 아닌 nothing인데 우리가 신으로 여기고 있다는 말이다. 마치 뭐와 같으냐면, 사랑하는 연인이 없는 남자가 자기 이상형을 생각하며 만들어 놓은 마네킹과 같다. 완벽한 여성을 만나고 싶은 남자가 있다. 그런데 그는 그 완전한 여성이 누군지 모른다. 그래서 자기의 이상형을 담아 마네킹을 만들었다. 완벽하다고 좋아했는데 어느날 생각해보니 키가 너무 적당하다. 키가 크면서 완벽한 이상형을 그리고 만들어 보았다. 어느날 생각해보니 키가 작고 귀여운 여성도 좋을 것 같아서 또 만들었다. 어느날 생각해보니 통통하면서 예쁜 여성도 좋을 것 같아서 만들었다. 그렇게 만들다보니 마네킹이 많아졌다. 다 아름답다. 나와 함께있다. 마네킹들과 사랑에 빠졌다. 하지만… 마네킹들은 진정한 그녀는 아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죄인들이 이리저리 만든 신들이라는 의미이다. 그들은 Creator 가 아니라 Created 된 것이다는 도전이다. “God created us, and we created other gods.”가 아니냐는 것이다. 더구나 고대사회의 신들이 대부분 자연신들로서 인간을 위해 피조된 것들인데, 우리는 그들을 신격화 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들이 있는데 무시하라는 말이 아니라, 원래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생긴 공허감을 채우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들이기에 실제가 아니니 제자리로 보내라는 것이다. 인간의 피조물들을 신으로 만들어 종노릇 하지 말고, 그 피조물들을 인간을 위해 존재하도록 제자리로 돌아가게 하라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사랑에 기초한 다른 신들의 존재>

신들이 결국 무엇인가? 인간의 두려움과 보이지 않는 영역에 대한 신비가 만들어낸 것으로 그저 인간의 두려움, 호기심, 기대의 집합체일 뿐이라는 것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보장을 위해서, 착하게 살아간 도덕적인 수고에 대한 보상을 위해서 신을 만들어 내었다는 것이다. 거대한 나일강을 보며, 하늘에 이글거리는 태양을 보며, 드넓은 들판을 보며 농사 잘되게 해주고, 홍수를 조절해 줄 것 같은 신을 만들어 내었다는 말이다. 실재가 아니라 피조물을 보고 인간이 신을 만들어 내었을 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호기심, 기대, 두려움도 보다 더 심각한 이유가 있다. 이런 신들을 만들어 내게 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욕망과 이기심을 추구하는 인간의 ‘자기사랑’이다. 오늘 3절은 그 근거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너는 나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고 번역하는데, 원어적으로 본다면, “내 면전에서 다른 신들이 너를 위하여 있게하지 말라” 여기서 “네게”라고 번역한 것을 필자는 “너를 향하여, 혹은 너를 위하여”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의미를 살린다고 본다. 우리가 다른 신들을 존재하게 하는 이유가 다 근본적으로 “나를 위하여”라는 것이다.
결국 다른 신들은 내 필요와 내 욕망 곧 나를 위하여 만들어낸 신들이라는 것이다. 내 새끼 위해서,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 내 사역과 목회를 위해서… 바로 이런 인간의 욕망과 이기심, 그리고 자기 사랑이 다른 신들을 만들어 낸다는 말이다. 지금도 우리는 나를 위하여 신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래서 결국은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신을 부리고 싶어한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나를 위하여”가 우상들을 만들어 내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도 다른 신들처럼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아니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다른 신들을 두어서 세상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기게도 만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우리 민족, 우리 가정만을 위한 신으로 이기적으로 만들어 버리면 하나님도 토템주의의 멧돼지, 소, 곰처럼 되어 버리는 것이다. 인간의 자기 사랑은 다른 신들을 만들어 낼 뿐 아니라, 하나님 조차 다른 헛된 신들처럼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3절, 1계명은 바로 종교적 배타성이 아니라,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에 대한 배타성임을 발견하게 된다.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이 아니라 자기사랑에 대한 배타성이다. 단순히 다른 종교아 안나가고 제사를 안 지낸다고 1계명을 잘 지키는 것이 아니다. 기억하자. ‘나를 위하여’라는 자기사랑은 “헛된 피조물들을 하나님처럼 만들어 버릴 수 있고, 나아가 하나님 조차 우상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1계명은 타종교와 싸움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의 이기심과 욕망… 하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괴물같은 자기 사랑과 싸우라고 한 것이다. 1계명은 종교분쟁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전쟁을 요구하는 것이다.

4. 셋째의미. 종교적 배타성이 아니라 사회적 배타성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1계명은 우리에게 종교적 배타성이 아니라 사회적 배타성을 가르쳐 준다. 인간의 이기심은 개인의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인간의 이기심은 공동체적 이기심으로 나타나며, 탐욕과 폭력을 정당화한다. 라인홀드 니이버의 말처럼, 개인적으로 도덕적인 사람들도 비도덕적 사회를 만들어낸다. 개인적으로 착한 백인이 인종차별로 가득한 사회를 만들어 내었다. 개인적으로 착한 경상도 전라도 사람이 지역감정으로 적개심을 가진 사회적 갈등을 만들어 낸다. 그렇다면 인간의 이기심과 욕망이 모이면 사회적 증폭이 엄청날 것이다. 

필자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바로 1계명이 이런 사회적 부패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이다. 무슨 말일까? 다음과 같은 질문에 답을 해 보자. 고대사회의 신들은 과연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 신들일까? 아니면 왕과 권력자들의 통치를 도와주는 신들이었을까? 고대사회에서 왕들은 항상 신으로 불리우는 존재였다. 파라오는 신으로 여겨졌고, 로마의 황제도 신으로 여겨졌다. 황제 숭배 사상이 가득한 시대였다. 당연히 수많은 신들은 최고 존엄을 위해 존재하는 장관 같은 존재들이었고, 그 왕을 지지하고 보호하는 것이 고대의 신들이었다. 항상 왕주변에 무당과 박사들이 왕을 위해서 점을 쳐주고 능력을 나타내던 것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당시의 이집트나 가나안의 종교는 바로 왕과 권력자들의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신들로 가득했다. 바알, 아세라, 맘몬같은 가나안의 신들 즉, 풍요와 다산(多産), 물질만능의 신들로 정복과 다산, 풍요, 물질적 번영을 무조건 선(善)으로 여겨주는 신들이었다. 비록 파괴와 탈취가 있을지라도 그것이 부요와 번영을 이루어준다면 그것은 결과적으로 선(善)이라는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신들이었다. 남의 아내를 빼앗든, 백성의 아들들을 죽으든, 백성의 딸들을 첩으로 데려가든 도덕적인 비난을 하지 않는 신들 말이다. 오히려 더 나아가 왕들이 탐욕을 축복과 번영으로 설명해주는 권력의 입맛에 잘 맞게 길들여진 신들이었다.  결국 왕권과 독재 권력자들의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신들이었다. 즉 인간의 이기심과 필요에 의해 창출되어진 신들이었다.


그런데 희한한 종교가 신이 나타난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의 하나님, 말 그대로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며, 노예들의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민초(민중)들의 하나님이었다. 애굽 땅 종되었던 것을 잊지 말라며 너희가 왕이든 제사장이든 귀족이든 돌쇠였다는 것을 강조한은 하나님이였다. 참 왕들의 입장에서 너무 귀찮고 피곤한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역사를 보면 왕들과 귀족들은 항상 하나님을 떠나 바알과 아세라를 지향했다. 대 놓고 우상숭배 하기 어려우면 하나님과 바알을 섞어 혼합주의 방식을 지향하기도 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절대 권력을 제한하고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하나님보다 바알과 맘몬 같은 가나안의 신들이 더 입맛에 맞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스라엘의 왕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신들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1계명에서 막아 버렸기 때문이다.

왕과 권력가들은 그래서 항상 가나안의 신들과 하나님을 혼합시키려 했고, 선지자들은 이것에 대항하여 계속 싸웠던 것이다. 1계명이 무너지면 이스라엘도 애굽이 될 것이고, 1계명이 무너지면, 이스라엘의 왕은 바로가 되고 신처럼 여겨지는 존재가 되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계명은 단순히 종교적 배타성만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 노예들의 하나님”이 “가나안 왕들의 신들”에 대해 드러내신 사회적 배타성을 드러내신 것이었다.

정도전이 말했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입니다. 백성을 위해서라면 하늘도 바꿀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과 유사하다. 말은 반대지만 정신은 같다. 지금 1계명은 “땅을 지키기 위해 하늘을 지키게 하신 것”이었고,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을 지키게 한 것”이었다. “하늘을 지켜야 땅을 지킬 수 있다”는 하나님의 속내가 보인다. 이것이 1계명의 세번째 존재 이유였다. 왕들과 권력가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신들로 바꾸려고 애를 썼지만, 그 입맛대로 못하도록 막았던 것이다.

이 1계명을 묵상하면서 깜짝 놀라고 많은 은혜를 받았다. 하나님이 연약한 우리를 얼마나 사랑했는지가 보여진다. 1계명을 보면서 하나님 사랑하라는 메시지만 보이면 아직 멀었다. “나만 사랑해야 되”하는 어리고 질투많은 여중생이 아니다. 당신을 지키라고 한 것은 바로 우리를 지키라고 하신 말씀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사랑하라고 발악하는 것이 아니다. 힘없는 민초들과 백성들을 사랑하려고 몸부림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저 잘 삐지는 존재로 자기 사랑안하면 따라다니면서 난리치는 사랑 결핍증 환자같은 스토커가 아니다.

5. 맺으며

종교적 배타성이 너무 중심이 되었던 교회 운동을 펼쳐왔다. 하지만, 종교분쟁을 열심히 해왔지만, 영적전쟁은 패해왔었다. 지금 우리가 싸워야 할 더 큰 적은 이슬람 이라는 종교나 무신론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하나님과 교회 조차도 우상으로 만들어 왔던 “자기 사랑” 곧 “나를 위하여”의 거짓 영성이다. 다른 신들이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이 문제이다.
기억하자. 우리가 타종교와 열심히 싸울때 하나님은 우리의 이기심을 향해 전쟁을 선포하실 수 있다. “나를 위하여”를 넘어서지 않으면 우리가 한 모든 신앙활동 조차도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 나를 위해서라면, 이 강단도 다른 신이 되고, 아름다운 예배당도 우상이 되는 법이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가 가장 중요한 오늘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 이 말이 얼마나 소중한 의미인지 다시 생각하자.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라는 메시지로 끝나서는 절대 안된다. 1계명은 뭘하지 말라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바로 한분 하나님 만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도전하는 것이다.

1계명이 어려운 이유는 타종교를 거부해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하여 살지 않아야 하기에 어려운 것이다. 1계명이 어려운 이유는 타종교를 거부해야 해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사랑해야 하기 때문이다. 타종교를 거부하는 일은 쉽다. 주님 도 사랑하는 일은 쉽다. 하지만, 주님만 사랑하는 일은 정말 어렵다.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게 기쁨을 찾지 말자. 항상 가짜가 진짜같고, 불량식품이 맛있을 것 같지만, 전혀 아무것도 아니다. 헛것들이 짜릿하고 나쁜 남자가 매력적이다. 속지 말라. 세상에 가장 예쁜 꽃을 찾으면 어떤 꽃일까? 그것은 분명히 조화다. 진짜 생화는 누렇게 되어 버린 이파리도 있고, 흙먼지도 있고, 벌레에게 상한 자국도 있는 법이다. 하지만, 조화는 완벽하다. 하지만, 생명이 없다. 그런 것들은 다 가짜다. 가짜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을 뿐이다. 마약은 치료약이 아니다. “주예수 보다 더 귀한 분이 많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있네… 세상 즐거움 다 누리고, 세상 자랑 다 얻었네”하고 살지 말자. 

신이 아닌 것들을 두려워하지 말자. 겁먹지 말고 기죽지 말자. 다 헛것이다. 기죽어 질질 끌려 다니지 말라. 돈을 따라 다니면 종된다. 돈을 무시해야 왕이된다. 하나님 한분만 사랑해라. 한 여자로 사랑 못하면서 몇 명이나 더 사랑하려 드느냐? 한 남자만 사랑 못하면서 몇 명이나 더 사랑하려 드느냐? 하나님 한분도 사랑 못하면서 얼마나 많은 세상을 사랑하려 하느냐? 타 종교를 안 믿는다. 우상 숭배를 안 한다고 스스로 속지 말라. 하나님 한분만 사랑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