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과유감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 영화 Review

양치는선비 2010. 3. 9. 16:11

감독: 리들리 스콧 감독

주연: 해리슨 포드

작가: 필립 K

원작: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

 

이해를 돕기위해

등장하는 로이는 강력한 복제인간 곧 넥서스 6로 불리는 레플리칸트로서 4살의 수명을 가진 존재이다. 등장하는 덱카드는 도망간 복제인간을 추적하여 제거하는 자로서 블레이드 러너라고 한다.


문제작으로 불리는 블레이드 러너 영화를 보고 느낀 것을 4가지로 정리해보았다. 미주 뉴스앤조이와 함께한 기독교 문화읽기에서 영화를 보고 미래사회에 대한 여러 담론을 논의할때 발제했던 내용이다. 내 느낌과 생각중심으로 정리되어서 좀 산만하다. 좀더 시간 여유가 있으면 잘 정리된 문제로 쓰겠는데, 일단 거친 표현 그대로 올려본다. 


1. 정보의 통제와 정보의 과잉속에 사는 우리

시사인의 문정우는 현대의 상황을 이해할때 조지오월의 <1984>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 대해 <죽도록 즐기기>의 닐 포스트만을 통해 보다 더 높게 평가한다. 빅 브라더에 의한 정보통제보다는 정보 과잉의 위험성이 훨씬더 맞았다는 점이다. 정보 과잉으로 인해 수동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로 인간으로 전락되고 이를 통한 효과적인 통제를 헉슬리는 우려했다. 멋진 신세계는 즐길 거리를 모든 사람들에게 쏟아부음으로 죽기까지 즐기게 함으로 인간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것이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보는 도시와 세상은 잉여정보조차 과잉공급된 세상임을 보게 된다. 그래서 인간이 의지를 갖고 변화를 꿈꾸기 보다는 순결과 단순함보다는 혼합과 무질서를 가치로 삼게하여 죽도록 즐기기를 통한 통제를 꿈꾼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은 비인간화의 길을 간다. 스스로 물질과 과잉 문명앞에 노예처럼 흡입당한 상태에 있다. 이상과 목표란 단어는 악으로 존재하고, 방종과 잉여속에 끈적거린다. 단지 상징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바벨탑 같은 타우렐사의 엄청난 빌딩이다.

한 마디로 올더스 헉슬리가 예측한 정보 과잉의 이기성과 조지 오웰이 두려워한 빅 브라더의 통제가 함께 어우러진 상태이다. 빅 브라더는 조지 오웰의 우려보다 더 치밀하고 영리하다. 문명을 파괴하는 통제가 아니라 과잉으로 공급하며 죽도록 즐기게 하며, 넥서스 6와 같은 복제인간을 통해 위안부, 극심한 육체노동, 전쟁을 수행하게 하며, 블레이드 러너와 같은 특수 통제집단을 통해 보이지 않는 통제를 시도한다. 이를 통해 다시 보는 두려운 미래는 조지 오웰올더스 헉슬리의 공존이다.

 

2. 어떻게 정당화 되는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복제인간을 만들어 전투용으로 위안부로 노동력 제공자로 활용하는 것을 본다. 그 결과 실제 인간들은 풍요롭고 가치있게 산다기 보다는 잉여인간으로 정보의 과잉속에 삶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살고 있다. 유토피아에 대한 왜곡된 추구와 인간의 가치에 대한 왜곡된 이해가 제국주의와 노예제도를 낳았던 것과 같은 과정임을 본다.

필자는 여기서 다소 위험스러운 도약이 이라 우려하지만, 진리의 부재 아니 혼합주의의 위험성을 본다. 과거 권력은 진리의 객관주의를 통해 독재적 지위의 정당성을 얻어왔다. 그렇기에 진리의 주관주의는 항상 변혁의 도구였다. 하지만, 앞으로 올더스 헉슬리의 생각으로 본다면, 빅 브라더는 해체주의적 진리관으로 세상을 독점하는 방법을 추구하지 않을런지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맞닥뜨릴 잉여사회에서는 진리의 객관주의가 변혁의 도구가 되지는 않을런지 모르겠다.


3.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마지막 로이와 블레이드 러너인 덱카드의 싸움장면이다. 넥서스 6로서 대장이라 할 수 있는 로이는 폐기의 상태에서 자신이 가진 기억을 말한다.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너희들이 갖지 못한 기억을 나눈다. 그리고 그 기억이 빗물속에 흐르는 눈물처럼 사라질 것이라고 말하며 time to die를 말하며 고개를 떨군요. 그러면서 그 삭막한 도시의 빌딩 옥상끝, 한없이 비가 쏟아지는 그곳에서 속절없는 비둘기가 하늘을 향해 날아오른다.

이 장면은 너무나 이 영화를 통해 제시된 인간다움의 요소에 대한 도전을 가한다. 블레이드 러너에서 인간과 리플리칸트를 구별하는 차이는 기억에 대한 것이다. 만들어진 존재이다보니 그들이 가진 기억은 존재하지 않는다. 약간의 기억이 사진을 통해 주입되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기억의 존재는 리플리칸트와 인간을 구별하는 가장 강력한 차이였다. 이에 대해 로이는 마지막을 맞으며 4년 수명밖에 없는 리플리칸트라 할지라도 인간임을 드러낸다. “난 너희 인간이 상상도 못할 경험을 했어. 오리온 전투에도 참여했고, 탄호이 기지에서 빛으로 물든 바다도 봤어. 그 기억이 모두 사라지겠지. 빛속의 내 눈물처럼…”

로이는 마지막 순간을 통해 기억을 논한다. 그리고 인간다움과 거리가 먼 집행자 덱카드를 향해 더욱 인간적인 마지막 구원의 손길을 제시한다. 하지만, 너네 인간들의 인간다움 이라 여기는 기억조차 죽음을 통해서는 빗속의 눈물처럼 사라지는 것임을 도전한다. 그리고 영화는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비둘기를 통해 로이의 영혼의 존재성을 상징적ㅇ로 제시한다. 이를 통해 4년의 수명을 가진 전투용 복제물인 로이를 통해 인간다움을 제시한다.

살펴보자. 덱카드도 결국 복제인간이었다. 단지 넥서스 6보다 훨씬 더 인간같은 인간이었을 뿐이었다. 말 그대로 인간보다 더 인간다움을 추구한 타우렐사의 걸작품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웃긴 것은 인간다우면 인간다울 수 록 비인간적이었다. 확실한 인간으로 제시되는 세바스찬, 바로 넥서스 6를 만든 유전공학자인 그는 조로증으로 죽어가는 모습이다. 그리고 가장 인간에게 가까운 모습으로 만들어진 덱카드는 여자도 뒤에서 쏘아 죽일 정도로 비인간적이다.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오히려 이 영화의 지구의 도시에서 발견하는 인간은 말 그대로 잉여인간일 뿐이며, 조로증으로 죽어가는 세바스찬의 모습이며, 타우렐사의 사장처럼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없으며, 잔인하고 비열한 인간 사냥꾼의 모습일 뿐이다. 결국 우리가 인간다움을 위해 만들어낸 수많은 과학의 진보가 비인간화란 돌연변이를 낳았음을 본다

4. 하나님의 인간 vs. 인간의 인간 

인간도 역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할때 블레이드 러너의 관점에서 리플리칸드, 곧 복제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과 인간의 차이는 무엇인가? 인간은 복제물에 대한 수명의 제한을 걸지만, 하나님은 영생을 주신다. 인간은 신성에 참여하는 특권을 누린다. 자신의 의지와 뜻으로 창조주의 의지를 거스를 만큼의 능력을 주었다고 할 정도다. 그리고 인간이 일으킨 문제에 대해서도 자신을 죽임으로 해결책을 제시한다.

하지만, 인간의 복제물은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인간다움에 참여할 기회가 피조순간부터 박탈당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그들은 4살이라는 결핍된 생명을 갖는다. 해결책을 찾기 위해 창조자를 향한 희망을 품어보지만, 아버지라고 부를 연민조차 느낄 수 없다. 절망한 로이, 결국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현실앞에 자신의 창조자를 죽이는 모습을 본다. 이를 통해 이 영화는 피조물의 창조주 살해가 있어도 해결책은 전혀 제시되지 않는다.

암울한 미래의 모습을 보여준 영화다.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인간에게서 잉여인간의 추악함을 보고, 험학한 복제인간에게서 인간다움의 참된 고민을 읽는 일은 슬픈일이다. 아무런 대책도 소망도 없는 자신의 창조자를 찾는 복제인간을 보며, 영원한 생명을 주고자 하는 창조주를 찾지 않는 인간의 모습에서 대조를 찾는다. 영화를 통해 참된 인간이 무엇이며, 창조주는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에게 생명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