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우연(偶然) 속에 필연(必然)을 보며

양치는선비 2023. 7. 10. 07:46

필연(必然)은 "사물의 결과가 반드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우연(偶然)은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뜻하지 않게 일어나다"는 뜻입니다. 우연을 필연으로 과하게 만드는 일은 고대 소설의 한 특징이기도 합니다. 아시다시피 고대소설은 권선징악적 주제로, 결말은. 해피엔딩이면서, 사건 전개는 항상 우연성에 기초합니다. 우연에 기초한 부자연스러움과 전개의 도약은 몰입도를 떨어뜨리고 우리를 불편하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필연이 사람의 우연으로 나타날 때 고대소설처럼 여겨지는 어색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연이 꼭 고대소설의 특징만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필연적 섭리를 발견하는 복선이기도 합니다. 언뜻 보면, 룻기는 하나님이 하신 일로 묘사된 것이 없는 듯 보입니다. 모두 우연(偶然)입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온 것도, 보아스의 밭에 일하러 가게 된 것도, 보아스와 룻의 만남도 하나님이 하신 것으로 묘사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연히'에 기초한 '하필이면 그때' 우연히 인도하신 것처럼 여겨지는 대목이 가득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우연이라 쓰고 하나님의 필연으로 읽습니다. 룻기에서는 하나님이 주어로 나오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이 동사로 역사하십니다.  

 

이번 안식월 첫 달을 보내면서 하나님은 우연 속에 필연으로 역사하신 하나님의 복선을 경험했습니다. 소소한 일상에서 작은 감사를 주시며 우리를 매우 유쾌하게 하셨습니다. '우연히, 마침, 어쩌다'와 같은 짧은 일상 언어 부사 속에 숨바꼭질하시며 '경륜(economy)과 섭리(providence)'라는 어려운 신학 언어를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이야기는 고대소설이 아니라 지금도 경륜과 섭리인 신학용어를 일상언어로 완성해 가는 과정입니다. 이번 안식월을 보내며 발견한 신학은 고대 박물관에 전시된 물고기 화석이 아니라, 펄펄 뛰며 뛰어오르며 퍼덕이는 살아있는 물고기였습니다. 

 

넓은 서울에서 만나려고 하지도 않았고, 만날 것을 기대도 안 했지만, 이제 서울을 나가는 김도혁목사님 부부와 서울에 들어온 저희 부부가 3분 거리에서 만난 것도 은혜였습니다. 과거 샌프란시스코 차이나 타운 가는 길에 펄쩍 뛰어오른 그 작은 트램 케이블카에서 온 가족이 만나 황당해하던 경험과 같았습니다. 광주 한신과 부산 고신이 LA 선한 청지기교회에서 만난 것도 놀라운데 이 만남의 가치를 하나님은 계속 느끼게 하셨습니다. 

 

서울 사랑교회에서 설교 후 인사 드린 권사님 가정과 만남도 놀라웠습니다. 같이 만나 식사하기를 원하셨지만, 부산 가는 일정 때문에 사양하고 헤어지려 했는데 부산에서 오신 권사님이셨습니다. 부산에 가서 숙소를 잡은 후 그래도 만나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지만, 그 권사님 댁과 불과 옆의 아파트에 숙소를 잡게 될 줄이야... 그리고 가정과 삶의 환경 그리고 사역의 공유점으로 인해 우연 속에 필연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서울에 있는 제 가족과 권사님 집이 다른 일로 다시 만나게 되는 일이 며칠 안에 다시 일어나는데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 외에도 우연히 제가 있던 숙소 곁에 또 한국방문하신 성도님들을 만나 가슴 아픈 지난날의 이야기를 나눌 수 도 있었고, 길가에 1분도 서 있지 않았는데 오랜 세월 서로 존중했던 친구 목사님이 차를 멈추고 뛰어와서 만나는 벅찬 감동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만남을 약속하고, 교회 부흥회 요청까지 받으며 만남이 이제 사귐으로 이어짐을 또한 경험합니다. 전혀 계획에 없던 일!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던 일이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일들이 연이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안식월은 꼭 만나야 했던 사람들을 만나게 하시기 위해 인도하신 하나님의 필연이었음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계획하고 진행하지만, 나보다 더 큰 계획으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경륜을 보는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보물 찾기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다시 고백하게 됩니다. "미국에 와서 내가 계획한 대로 된 일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지난 세월 미국 생활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시간이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 시니라" [잠 16:9] 

 

소소하고 작은 일상을 통해 하나님은 저에게 고백하게 하셨습니다. "지난 14년의 담임목회도 그 걸음을 하나님이 인도하셨고, 앞으로 남은 목회도 내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하신다!" 내 계획대로 되지 않았어도 하나님은 주님의 계획을 이루셨습니다. 내 계획대로 되지 않아도 죽지 않았고, 실패조차도 합력하여 이루신 선의 통로였습니다. 그래서 조급하지 않고 낙심하기 전에 삶을 조금 더 넉넉하게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이 조금 더 따뜻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깨달음으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더 유념하고 싶은 것이 있어 마무리할 글을 조금 더 이어봅니다. 멀리 있는 우연(偶然)을 통한 삶의 의미도 중요하지만, 가까이 있는 필연(必然)의 소중함을 더욱 가치 있게 여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노라면... 필연인 줄 알았는데 우연에 머무른 것도 있고, 우연인 줄 알았는데 필연이기도 했습니다. 필연을 우연처럼 여기며 살기도 하고, 우연을 필연처럼 여기며 살기도 합니다. 이렇게 사람은 분에 넘치도록 과(過)하게 주어진 것을 경(輕)하게 여기는 실수도 하고, (輕)하게 여겨야 할 것을 과(過)하게 여기는 실수를 하나 봅니다. 그 실수를 줄이며 살아가는 것이 섭리와 경륜을 알아가는 성도의 길이라 여겨 봅니다. 

 

알고 보면, 필연(必然)은 대부분 가까이 있습니다. 필연(必然)이기에 가까이 있는 법이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가까이 있어 그 필연(必然)의 소중함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가족도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멀리 있는 우연(偶然)을 그리워하고 동경하다가, 가까이 있는 필연(必然)의 소중함을 잊어버리고 살지 않았을까요? 귀한 행운의 네 잎 클로버를 찾다가 행복이라는 꽃말을 가진 흔한 클로버를 가벼이 여긴 것처럼요.

 

우연 속에 하나님의 섭리와 필연(必然)을 보는 법을 배웁니다. 동시에 가장 가까운 곳에 하나님의 필연(必然)이 함께함을 배웁니다. 소중하게 가꾸어야겠습니다. 다음 꿈을 꾸며 작은 바람을 적어 봅니다. "우리의 우연은 하나님의 필연이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저의 필연(必然)입니다. 그리고 저도 여러분의 필연(必然)이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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